[스포츠조선 윤진만 기자]와인은 오래될수록 맛이 깊어진다. 위기의 순간, 백전노장의 지략이 빛을 발하고 있다. K리그1 현역 최고령 사령탑인 김학범 제주 감독(64)은 10월에 펼친 '하나은행 K리그1 2024' 3경기 대전하나(2대1 승), 인천(2대1 승), 전북(1대0 승)을 전승으로 이끌었다. 파이널B에서 경쟁하는 팀들과의 '승점 6점짜리' 경기였다. 27일 홈 제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전북과의 35라운드에서 후반 25분 송주훈의 결승골로 1대0 승리하며, 승점 47점으로 7위에 올라선 제주는 3경기를 남겨두고 승강 플레이오프권인 10위 대구(39점)와의 승점차를 8점으로 벌렸다. 내달 3일 대구와의 36라운드 원정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1부 잔류를 확정짓는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8위 광주(44점)와의 승점차도 3점으로 벌어져 '하스왕'(하위스플릿 1위)도 유력한 상황이다.
5월 한 때 11위까지 추락한 제주를 살린 건 '학범슨'(김학범 감독과 알렉스 퍼거슨 전 맨유 감독을 합친 말)의 지략이었다. 올 시즌을 앞두고 제주 지휘봉을 잡은 김 감독은 빠른 패스웍을 통한 공격 축구를 플랜A로 준비했지만, 최영준 임채민과 같은 주요 선수들의 줄부상과 무더운 날씨에 육지와 섬을 오가야 하는 피로도 등을 고려해 빠르게 플랜B '선수비 후역습'으로 방향을 틀었다. 전임 남기일 감독 시절부터 안정적인 수비에 일가견이 있던 제주는 새로운 전술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지난 9월 주장 임채민이 턱 부상에서 돌아와 완전체 수비진을 구축한 뒤 31라운드 광주전부터 전북전까지 5경기에서 4승1패, 승점 12점을 따냈다. 그 이전 5경기에서 1승4패를 기록한 것과 정반대 행보다.
'학범슨'은 디테일을 만졌다. 올해 '대박'을 친 미드필더 이탈로를 과감히 선발에서 뺐다. 전반에 안정적으로 경기를 운영한 뒤 풍부한 활동량과 과감한 전진 능력을 지닌 이탈로를 후반에 투입해 승부를 본다는 복안이었다. 팀내 최고의 선수를 '반 게임'만 뛰게 한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자칫 전반에 기선을 빼앗길 수도 있기 때문. 하지만 '이탈로 조커 전략'은 결과적으로 제주에 꼭 맞는 옷이었다. 제주는 최근 5경기에서 넣은 8골 중 7골을 이탈로가 투입된 이후 시점에 작성했다. 이탈로 본인도 잔류 싸움에서 중요한 34라운드 인천전에서 후반 43분 극적인 결승골을 터뜨렸다. 김 감독은 이탈로 한 명만 달랑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대표를 지낸 공격형 미드필더 남태희를 이탈로와 세트로 투입하며 미드필더 강화 효과를 극대화했다.
김 감독은 전북전을 앞두고도 선수들에게 '세트피스에서 한 골 넣을 것'이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가 하면, 측면 공간을 일부러 열어뒀다. 장신 공격수를 따로 두지 않는 전북이 세트피스 수비에 약점을 보일 것이고, 측면을 열어두면 단조로운 크로스 공격에 그칠 것이라고 정확히 분석했다. 전북은 이날 40개의 크로스로 단 한 골을 만들지 못했다.
또, 김 감독은 동계 훈련 때 90분이 아닌 추가시간을 포함한 100분 체력을 만들기 위한 강한 체력 훈련을 진행했는데, 그런 훈련이 후반기 막판 후반전에 힘을 내는 원동력이 됐다.
"김학범 감독식 훈련이 힘들긴 하다"고 혀를 내두른 남태희는 "하지만 감독님이 워낙 유쾌하게 선수들을 잘 관리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다. 성적이 좋지 않을 때에도 감독님이 분위기를 잘 만든 덕에 이렇게 반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잔류의 9부 능선을 넘어 부담을 던 제주는 이제 남은 3경기에서 잔류 캐스팅보트 역할에 집중할 전망이다. 당장 내달 3일 대구의 잔류 운명을 좌우할 경기가 기다린다. 윤진만 기자 yoonjin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