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김성원 박찬준 기자]한국 축구의 선택은 '레전드' 홍명보(55)였다. 대한축구협회는 7일 '국가대표팀 차기 감독에 홍명보 감독을 내정했다. 8일 오전 10시 축구회관에서 이임생 기술본부 총괄이사 관련내용 브리핑 예정'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홍 감독은 2014년 브라질월드컵 이후 10년 만에 A대표팀으로 돌아왔다. 지난 2월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을 전격 경질한 후 약 5개월 동안 이어진 KFA의 새 감독 찾기도 마침표를 찍었다.
긴 여정이었다. KFA는 클린스만 감독 경질 후 곧바로 후임 사령탑 찾기에 나섰다. 정해성 KFA 대회위원장을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장으로 선임했다. 정 위원장은 "거수기는 하지 않겠다"며 전술, 육성, 소통 등 새로운 감독의 8가지 기준을 공개했다. 5월 내 선임을 가이드라인으로 한 KFA는 3월 태국과의 2연전을 황선홍 임시 감독 체제로 치렀다.
4월부터 속도를 냈다. 제5차 전력강화위 회의를 통해 11명의 후보가 추려졌다. 국내 지도자는 4명, 외국인은 7명이었다. 비대면을 통해 외국인 후보군과 접촉한 정 위원장은 직접 유럽으로 떠나 면접에 나섰다.
제시 마치 감독이 1순위로 떠올랐다.<스포츠조선 4월 29일 단독 보도>하지만 협상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치 감독은 결국 캐나다 대표팀을 택했다. 2순위였던 헤수스 카사스 이라크 감독과 접촉했지만, 협상은 불발됐다. 3~4순위였던 브루노 라즈, 세뇰 귀네슈와 협상 테이블을 차리는 대신 '전면 재검토'를 결정했다.
결국 5월 선임은 실패했고, 6월 싱가포르, 중국과의 2연전은 김도훈 임시 체제로 소화했다. 시간을 벌게된 전력강화위는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리스트업을 했다. 3일 8차 회의를 통해 12명의 후보군을 추렸다.
기류에 변화가 생겼다. 외국인 감독으로 못박았던 이전과 달리, 국내 감독에 대한 가능성을 열었다. 12명의 후보 중 2명의 국내 감독을 포함시켰다. 현실적인 이유가 컸다. 무조건 선임될 줄 알았던 마치 감독 영입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돈이었다. 클린스만 감독 위약금, 천안축구센터 건립 등으로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KFA가 새 감독을 위해 쓸 수 있는 돈은 제한적이었다. 8차 회의에서 후보군을 거를 당시 주요 화두 역시 돈이었다. 거액이 드는 특급 외국인 감독을 데려올 수 없을 바에는 국내 지도자를 택하는 것이 낫다는 현실론이 강하게 고개를 들었다.
18일 열린 9차 회의에서 12명의 후보군에 대한 평가가 진행됐다. 4~5명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카사스 감독, 거스 포엣 전 그리스 감독 등이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그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던 후보는 홍명보 감독이었다. 당초 몇몇 언론으로부터 '급부상'이 거론됐던 김도훈 감독에 대한 평가는 높지 않았다.
3일 뒤 21일 깜짝 10차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서 4명의 후보가 추가됐다. 다비드 바그너 전 노리치시티 감독이 여기서 등장했다. 홍 감독을 비롯해 카사스, 포엣, 바그너 등 높은 점수를 받은 후보들에 대한 순위를 논의했다. 국내 감독과 외국인 감독의 우선 순위를 두고 난상토론이 펼쳐졌다. 결국 공은 정 위원장에게 넘어갔다. 정 위원장은 곧바로 비대면을 통해 거론된 외국인 감독 후보군과 접촉했다. 모든 후보에 대한 평가를 마친 정 위원장의 1순위는 홍 감독이었다.
변수가 생겼다. 정 위원장의 선택은 KFA 고위층과 생각이 달랐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지난 4월 방한해 추천했다는 그레이엄 아놀드 호주 감독의 이름이 언론을 통해 거론되기 시작했다. 결국 지난달 28일 정 위원장이 전격, 사퇴했다.<스포츠조선 6월28일 단독 보도> KFA는 이임생 기술총괄이사에게 키를 맡겼다. 이 이사는 30일 화상 회의를 주재했다. 노장파 위원들은 불참했고, 이는 줄사퇴로 이어졌다.<스포츠조선 7월1일 단독 보도> '정해성 전강위 체제'가 붕괴됐다.
당혹스러운 분위기 속,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 이사는 정해진 타임테이블 대로 움직임을 이어갔다. 리스트에 있는 외국인 후보들을 직접 만나기로 했다. 이 이사는 2일 유럽으로 떠났다. 면담 대상자는 포엣 감독과 바그너 감독이었다.<스포츠조선 2일 단독 보도> 이 이사는 이들과 면담을 마친 후 5일 귀국했다.
이제 마지막 퍼즐은 홍 감독이었다. 면담 결과, 포옛, 바그너 감독은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정몽규 회장으로부터 전권을 부여 받은 이 이사의 결론은 홍 감독이었다. 이 이사는 "만나지 않겠다"던 홍 감독의 마음을 돌려, 귀국 당일 비밀리에 만남을 가졌다. 이 이사는 적극적으로 홍 감독을 설득했다. 제안을 받은 홍 감독은 밤을 지새며 고민했다. 울산 고위층과도 긴밀하게 상의했다. 울산의 구단주를 겸하고 있는 권오갑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도 'OK 사인'을 내렸다.
홍 감독의 수락 의사가 전해지자, 움직임은 더욱 바빠졌다. 7일 오전 홍 감독과 KFA는 마지막 교감을 나눴고, 마침내 새로운 감독이 정해졌다.
홍 감독은 설명이 필요없는 한국 축구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대학교 2학년 때 꿈꾸던 태극마크를 단 홍 감독은 역대 최고의 수비수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역대 최다인 A매치 136경기에 나섰다. 1990년 이탈리아, 1994년 미국,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 출격한 홍 감독은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이끌며, 화려한 축구인생을 마무리했다.
지도자로도 승승장구했다. 2004년 현역 은퇴 후 행정가 수업을 받던 홍 감독은 당시 A대표팀을 이끌던 딕 아드보카트 감독의 코치 제안을 받았고, 수차례 고사 끝에 수락했다.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 홍 감독은 2009년 U-20(20세 이하) 대표팀 사령탑으로 첫 발을 뗐다. 그 해 이집트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에서 18년 만의 8강 진출을 이끌었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는 한국 축구 사상 첫 동메달을 선물했다.
꽃길만 걸었던 홍 감독은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서 실패하며 고개를 숙였다. 첫 번째 실패였지만 가혹했다. 한동안 야인 생활을 한 그는 중국 프로축구 항저우 감독을 거쳐, 행정가로 한국 축구에 돌아왔다. 2017년 11월 KFA 전무이사로 선임된 그는 성공적인 변화를 이끌었고, 2020년 12월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울산의 지휘봉을 잡은 그는 또 신화를 썼다. 2022년 17년 만에 울산의 K리그1 우승을 이끈 홍 감독은 지난해에는 창단 후 첫 2연패를 선사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K리그1은 시즌이 한창이다. 그는 처음 후보군으로 거론된 3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울산 팬들의 '성난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5월에 이어 7월 또 다시 이름이 언급되자, "내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직간접적인 제안에도 흔들림이 없던 홍 감독이었다. 하지만 돌고 돌아 또 다시 제안이 들어왔다. 삼고초려를 넘은 십고초려였다. 홍 감독도 더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6일 수락 의사를 전했다. 계약기간은 2027년 아시안컵까지가 유력하다.
운명이었다. "이 길이 내가 걸어야 할 길이라면 피하고 싶지는 않다. 선수 시절 쌓아놓은 명예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받아들이겠다." 19년 전인 2005년 그의 출사표는 여전히 유효하다. 홍명보의 또 한번의 도전이 시작됐다.김성원, 박찬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