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조지영 기자] 눈물과 감동, 그리고 웃음이 공존한 순간이다. 언제나 늘 당당하고 아름다웠던 모습 그대로, 미련도 아쉬움도 남기지 않고 쿨하게 떠난 '청룡의 여인' 김혜수가 지난해 청룡영화상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참으로 김혜수다운 엔딩크레딧이었다.
1986년 영화 '깜보'(이황림 감독)로 데뷔한 김혜수는 독보적인 비주얼과 출중한 연기력, 반짝이는 스타성으로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당대 최고의 라이징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무려 35편(이하 특별출연·내레이션 제외)의 영화와 44편의 드라마를 이어가며 쉼 없이 달려온 김혜수는 철학이 담긴 연기 필모그래피를 쌓으며 'K-콘텐츠'를 대표하는 '국가대표급' 배우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치명적인 팜므파탈로 모두를 유혹했다가 전혀 다른 묵직한 정극 연기로 대중의 허를 찔렀고 또 서늘한 악역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차진 코믹 연기로 남녀노소 모든 관객의 마음에 단비를 내렸다. 매 작품 전천후, 일당백 활약을 이어갔고 이런 그의 선택은 언제나 관객으로부터 믿고 보게 만드는 신뢰를 형성했다. 김혜수의 작품을 본 관객만 5020만677명(영화 기준). 약 5020만명의 관객이 김혜수를 보며 웃고 울었다.
스포츠조선 1만호를 기념한 인터뷰에서 김혜수는 "이렇게 이 일을 오래 할 줄 몰랐다. 그럴싸한 (롱런의) 비결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웃었다.
그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차츰 더 신중히 판단하는 법을 배웠다. 잦은 실수 속에서 반복되는 실수를 줄이려고 나름의 부단한 노력을 이어갔던 것 같다"며 "지금도 촬영장에 가기 전 마음속으로 늘 되묻는다. '지금 나는 현장에 갈 자격을 갖췄나?'라며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놓치는 부분이 많고, 내가 한 선택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나의 소임에 몰두하려고 한다. 세상 모든 사람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나 또한 내 선택을 완성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나는 배우로서도, 한 사람으로서도 성장이 느린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오랜 시간 나를 기다려주고 지켜봐 준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크다"며 오랫동안 지지를 보낸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알게 모르게 힘들었던 슬럼프의 순간도 있었다는 김혜수는 "슬럼프라는 게 타인에게 드러날 때도 있지만 반대로 가까운 지인조차 느끼지 못할 때가 있더라. 심지어 스스로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찾아오기도 한다. 나 역시 살면서 여러 차례 슬럼프를 겪었고, 때로는 끝이 안 보이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계속 해 내야만 하는 시기가 있었고, 진심이 왜곡되는 순간이 있었다. 모두가 내게 등을 돌린 듯한 혹독한 외로움과 마주하게 될 때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누구라도 지치고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시기가 온다.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라 가까스로 그런 시기를 잘 보냈다 하더라도, 또다시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슬럼프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슬럼프를 극복하겠다는 목표보다 그 괴로운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며 어떻게 보내는지에 더 의미를 두었던 것 같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어떠한 태도로, 무엇에 집중하면서 보내는지에 따라 그 이후의 시간이 달라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기 때문이다"고 전했다.
김혜수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늘 한결같은 만인의 '퀸'으로 자리 잡은 김혜수의 롱런 비결은 끊임없는 성찰과 부단한 노력이었던 것. 그리고 이러한 성찰과 노력은 매년 청룡영화상을 통해 빛을 발했다.
김혜수는 1993년 제14회 청룡영화상 MC를 시작으로 1998년(심혜진 사회)을 제외하고 지난해 11월 열린 제44회 청룡영화상까지, 30번째 진행을 도맡았다. 무려 30회 청룡영화상 진행을 맡은 김혜수는 국내는 물론 전 세계 시상식에서 가장 오랫동안 진행을 이어간 최장 MC로 기록을 세웠다. 그간 남성 MC 중심이었던 시상식을 특유의 따스한 카리스마로 장악하며 매력을 과시한 김혜수는 청룡영화상의 아이콘으로 등극, 진행 역사의 판도를 바꾸며 대체 불가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특히 김혜수의 30번째 진행이었던 제44회 청룡영화상은 김혜수가 청룡영화상과의 인연에 마침표를 찍은 시상식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다사다난했던 2023년을 보내고 청룡의 해를 맞은 김혜수는 "지난해는 영화 '밀수'(류승완 감독) 개봉 일정을 제외하면 개인적으로 안식년과 같은 시간이었다. 여전히 배우와 관객,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득한 꿈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양한 방식의 여성 서사와 캐릭터들이 역량 있는 배우들을 통해 마음껏 펼쳐질 수 있기를, 그리고 관객과 어우러질 수 있기를 꿈꾸고 있다. 또, 30회를 진행했던 청룡영화상을 마무리한 해이기도 했다. 내 인생에 깊게 자리 잡고 있던 청룡영화상을 소중히 봉인해 가슴에 담아 넣은 해였다"고 곱씹었다.
청룡영화상과 작별에 대해 그는 "지난 2022년, 제43회 청룡영화상 관련 기사들을 보다가 그해 내가 청룡영화상 진행을 맡은 지 29회째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2023년을 마지막으로 마무리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 같다"며 "무엇보다 2024년은 '청룡의 해'이니까 새롭게 청룡영화상을 재정비하기 좋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30회 정도면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자연스러운 마무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결심이 선 순간을 떠올렸다.
김혜수 인생에서 가장 최장기 작품이었던 청룡영화상. 가장 아름다운 정점의 순간 웃으며 안녕을 고한 그녀의 마지막 엔딩크레딧은 그녀답게 심플하고 쿨했지만 오히려 대중에겐 그 어떤 순간보다 강렬한 울림과 깊은 여운을 남긴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게 됐다. 김혜수의 과감하고 파격적인 결단에 박수와 응원이 이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별히 애정하는 스포츠조선, 1만호의 모든 기록과 역사에 경의를 표합니다. 나의 청춘을 함께 했던 청룡영화상이었습니다.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긴 프로젝트였고요. 매년 청룡영화상을 통해 배우로서의 자의식과 안목 또한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같은 일을 하는 영화인들과 동료들에 대한 진심 어린 존경과 사랑을 배운 소중한 시간이고요. 청룡영화상은 제게 끊임없는 영감과 성찰을 가져다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조지영 기자 soulhn1220@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