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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복서' 김태호의 복싱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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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의 복싱 히스토리> 14. '천재복서' 김태호의 복싱 인생



이번 주 복싱 히스토리의 주인공은 69년부터 75년까지 밴텀급. 페더급. 라이트급 등 3체급에 걸쳐 국가대표로 맹활약하며 '동양의 특급'으로 불렸던 쾌남아 김태호다. 75년 10월 프로로 전격 진출, 77년 11월 국내에서 10번째 세계 타이틀에 도전한 그는 원조 꽃미남 복서이자 당시 유일한 '학사 복서'(경희대)로도 유명하다. 필자와 김태호의 인연은 수년 전 한국체대 유종만 교수에게 그의 연락처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첫 소통은 결코 쉽지 않았다. 몇 차례 전화도 하고 필자의 칼럼을 꾸준히 보내는 등 지극 정성으로 연락을 취했지만, 크렘린처럼 굳게 닫힌 그의 마음은 열리지 않았다. 우공이산의 간절함으로 답을 기다리던 그에게서 며칠 전 연락이 왔다. '복싱에 애정을 지닌 자네에게 선배로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철옹성을 구축했던 크렘린은 그렇게 붕괴되었다.

김태호는 52년 서울 출신으로 67년 서울 중앙체육관에 입관한 후 68년 대경상고 1학년 때부터 전국 무대를 휩쓴 복싱 신동이었다. 졸업반인 70년엔 방콕아시안게임 밴텀급 동메달을 시작으로 72년 뮌헨올림픽 8강, 73년 세계군인선수권 우승과 아시아선수권 우승, 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라이트급 금메달. 아시아올스타 대표 미국 국제경기 최우수선수상, 75년 세계군인선수권 우승 등 국제무대를 호령하며 국위를 선양한다. 당시로선 큰 편에 속한 1m77의 훤칠한 키에서 내리꽂는 스트레이트가 발군이었고, 빠른 스피드와 함께 동물적인 감각의 동체시력은 복서로서 최적화된 완성품이었다. 게다가 태릉에서 새벽훈련할 때도 유종만, 황철순과 함께 선두권을 유지하며 뛸 정도로 주력도 좋았다.

하늘이 주신 좋은 신체 덕분에 그는 100전을 상회하는 아마추어 커리어에서 국내 복서에게는 단 3패만을 기록할 정도로 견고한 아성을 구축한다. 고생근, 김성은, 서상영 단 3명만이 김태호를 이긴 주인공이다. 김태호는 복싱에 필요한 고성능 소프트웨어를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한 곳에 짐중시키는 열정이 부족했다. 김태호와 호형호제하는 한체대 유종만 교수는 "70년대 초중반 기라성 같은 국가대표 선수 중에 김태호의 기량은 '군계일학'이었다"고 운을 뗀 뒤 "올림픽 등 큰 경기를 앞에 두고도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 천재형 복서였다"고 평했다. 필자에게도 열정지수가 부족한 복서로 기억된다. 최첨단 하이테크한 기량에 비해 간절함과 열정이 뒷받침되지 않은 복서였다.

75년 김태호는 프로로 전향한다. 당시 국내 첫 세계챔피언을 지낸 김기수와 베테랑 프로모터 유종배 듀오가 손을 잡고 김태호를 스카우트해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세계챔피언을 만들겠다는 프로젝트를 작성한 후 그해 10월 프로 데뷔전을 요시무라(일본)를 상대로 치러 3회 KO로 신고식을 한다. 12월엔 세계 랭커이자 국내 슈퍼라이트급 챔피언 김종호를 물찬 제비 같은 빠른 몸놀림으로 철저하게 유린하며 군말 없는 판정으로 잡고 WBA 라이트급 8위에 랭크된다. 76년도에는 니시다 히로미, 나리다 조겐 등을 잡으며 6연승(3KO승)을 질주하자 76년 10월 드디어 벤 빌라폴로(필리핀)를 꺾고 WBA 주니어라이트급 챔피언에 등극한 사무엘 세라노 측과 물밑접촉을 시도한다. 당시 챔피언 사무엘 세라노는 32승(7KO) 1무 2패를 기록한 김태호와 비슷한 유형의 복서였다. 66년 김기수, 74년 이창길과 홍수환, 75년 김현치와 유제두, 76년 염동균 등 7명의 복서가 모두 9차례 세계타이틀전에 도전해 김기수, 홍수환, 유제두, 염동균 등 4명이 정상 정복에 성공한 초창기 한국 프로복싱 역사에서 10번째 도전자로 나선 김태호는 5번째 세게 챔피언 후보로서 손색이 없었다. 김태호 측은 당시 1급 트레이너인 일본인 마쓰모토씨를 영입해 트레이닝 캠프를 차리고 강훈에 돌입한다. 66년 김기수의 타이틀전에 리처드 보비라는 트레이너가 등장한 이후 10년 만에 외국인 트레이너를 영입한 것이다.

그러나 엉뚱한 곳에서 불똥이 튀어 경기는 무산되고 만다. 그해 10월 인천에서 벌어진 WBA 밴텀급 타이틀 매치에서 도전자 홍수환이 자모라에게 12회 KO패하는 과정에서 야기되었던 판정 불복과 인정료 체납, 그리고 메이란 주심 구타 사건 등 여러 가지 난제들을 해결하고자 WBA는 부회장 산체스를 한국에 급파해 미지급된 인정료 6000달러를 조속히 납부할 것과 어떠한 판정에도 승복할 것이라는 다소 굴욕적인 각서를 WBA에 제출할 것을 통보하자 KBC(한국권투위원회)는 조건을 제시받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이에 WBA는 경기를 열흘 남기고 김태호ㅡ세라노 타이틀전을 전격 철회하고 만다. 김태호는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허탈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병자호란 당시 청태종처럼 고압적인 자세를 취한 WBA의 갑질에 모욕감을 느낄 만도 했겠지만, 합리적인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한 KBC 회장단은 공신력을 잃었고, 스포츠 외교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에서 준비한 타이틀전의 유산은 김태호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그 후 그는 악몽과 불면증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면서 마치 목에 걸린 가시처럼 삼키지도 못하는 응어리로 남아 의욕을 완전 상실한다. 그 경기가 김태호 복싱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였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복싱에 매달려 온 김태호는 너무 지쳐 있었다. 77년 10월 20일 우여곡절 끝에 챔피언 세라노의 4차 방어전 도전자로 낙점된 김태호(당시 8전 8승 3KO)는 기세가 꺾인 채 푸에르토리코로 원정을 떠난다. 미국의 자치령인 인구 400만의 남한 면적과 비슷한 푸에르토리코는 카리브해의 조그만 섬나라로 윌프레도 고메스, 윌프레도 바스케스, 윌프레도 베니테스 등 윌프레도 가문에서만 3체급 챔피언 3명이 탄생한 복싱 강국이다. 챔피언 세라노를 맞이한 김태호는 날제비처럼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라이트 일격으로 3회 선제 다운을 빼앗는 등 초반 우세하게 경기를 운영했지만, 지독한 무더위와 버팅에 의한 눈 부상, 체력저하 등 삼중고를 극복하지 못하고 10회 KO패로 경기를 마감한다. 7개월 만에 컴백한 김태호는 복귀전에서 나카네 미쓰유리에게 4회 KO승을 거뒀지만, 9개월 만에 치러진 김광민과의 라이트급 4강전에서 패하면서 사실상 복싱과 이별의 잔을 마신다. 12전 10승(4KO승) 2패의 전적을 남기고. 한국복싱 100년사에서 백인철, 박기철, 조인주와 함께 '노력하지 않는 천재복서 사대천왕'으로 회자되는 김태호.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복싱에 조금만 더 노력을 기울였다면 동양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과 세계챔피언'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던 능력 있는 복서"라고 호평하는 유종만 한국체대 교수의 회고가 설득력 있게 들린다.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