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강릉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
몇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세계신기록이 20분 간격으로 이어졌다. 시작은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18·러시아)였다. 5그룹 첫번째로 연기를 펼친 메드베데바는 기술점수(TES) 43.19점에 예술점수(PCS) 38.42점을 합쳐 81.61점을 얻었다. 11일 팀 이벤트에서 자신이 세운 쇼트 세계신기록(81.06점)을 경신했다. 모두가 메드베데바의 1위를 점치던 순간, 또 한번의 세계신기록이 나왔다. 주인공은 알리나 자기토바(15·러시아)였다. 5그룹 네번째로 나선 자기토바는 TES 45.30점에 PCS 37.62점을 합친 82.92점을 기록하며 메드베데바가 세운 세계신기록을 곧바로 갈아치웠다.
채점표를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TES부터 보자. TES는 기본점수에 수행점수(GOE)를 더해 산출한다. 메드베데바와 자기토바는 기본점수와 GOE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둘은 10%의 가산점이 붙는 1분10초 후에 점프요소를 집중배치해 기본점수를 높였다. 메드베데바는 기본점수 33.10점에 GOE만 10.09점을 받았다. 자기토바도 마찬가지다. 기본점수만 11.10점에 달하는 트리플 러츠-트리플 루프를 뛰는 자기토바는 기본점수 34.97점에 GOE는 10.33점을 얻었다.
PCS는 더욱 대단하다. PCS 구성요소는 ▶스케이팅 기술 ▶트랜지션 ▶퍼포먼스 ▶안무(컴포지션) ▶음악해석 등의 5개 부문으로 나눠 심판이 각각의 구성요소에 대해 점수를 준다. 그리고 '팩터(Factor·0.80)'와 곱해 총점을 도출한다. 메드베데바와 자기토바는 모든 요소에서 9점 이상을 받았다. 메드베데바의 경우 스케이팅 스킬(9.54점), 퍼포먼스(9.71점), 안무(9.68점), 음악해석(9.71점)에서 9.5점을 넘겼다. 자기토바는 퍼포먼스에서 9.64점을 받았다. 점수만 보면 그야말로 압도적인 연기다.
하지만 이들의 연기는 점수만큼 인상적이지 않다. 기술이야 그렇다고 해도, 예술면에서는 채점표의 엄청난 PCS만큼은 아니다. 역사상 최고의 연기 중 하나로 꼽히는 2010년 밴쿠버동계올림픽 김연아의 채점표와 비교해보자. 당시 김연아는 기술성과 예술성에서 모두 최고라는 평가를 들었다. 김연아는 TES 44.70점과 PCS 33.80점을 더해 당시 세계신기록인 78.50점을 받았다. TES부터 보자. 김연아는 스핀에서 다소 약점이 있었지만, 점프에서는 교과서로 불릴 정도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토바에 0.60점 뒤진 결정적 이유는 가산점이다. 2010년에는 1분10초 후 가산점이 붙지 않았다. 기술요소는 정해진 채점표에 따라 진행되는 만큼 별 이견이 없다.
문제는 PCS다. 김연아는 스케이팅 기술에서 8.60점, 트랜지션에서 7.90점, 퍼포먼스에서 8.60점, 안무에서 8.40점, 음악해석에서 8.75점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대단한 점수였다. 앞서 언급한대로 김연아는 예술성에서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메드베데바와 자기토바의 엄청난 점수에는 미치지 못한다. 메드베데바에게는 무려 9.39점이나 뒤진다. 물론 단순비교는 어렵다. 일단 김연아 현역 시절과 비교해 지금의 피겨는 스케이팅과 트랜지션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 메드베데바와 자기토바는 그 정점에 있는 선수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차이가 너무 크다. PCS에서는 기본적으로 연륜이 있는 스케이터들이 유리하다. 기술 요소야 주니어와 차이가 없지만, 아무래도 예술 요소에는 경험이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메드베데바는 시니어로 데뷔한지 3년 밖에 되지 않았고, 자기토바는 올해가 데뷔해다. 아직 전성기도 오지 않은 스케이터들이 매경기 역대급 PCS를 찍고 있는 것이다. 방상아 SBS 해설위원은 "2014년 소치 대회 이후 점수 인플레이션이 생겼다. 특히 심판의 주관적 판단으로 결정이 되는 PCS에서 점수를 후하게 주는 경향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메드베데바와 자기토바는 이러한 트렌드의 최대 수혜자인 셈이다.
점수가 높아진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앞서 언급한 가산점이다. 메드베데바와 자기토바는 가산점이 붙는 후반대에 점프를 집중 배치한다. 최대한 점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영리한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비판의 목소리도 많다. 미국 USA투데이의 칼럼리스트 크리스틴 브레넌은 "프로그램 전반부에 점프를 하면 다리에 피로가 생긴다. 그걸 감안해 후반부에 뛰는 점프에 10% 가산점을 더 주는 것이다. 자기토바는 전반부에 점프를 단 한 번도 뛰지 않기 때문에 후반부에 노력 없이 가산점을 받아간다"고 꼬집었다. 2016년 세계선수권 은메달리스트 애슐리 와그너(미국)도 자기토바의 프로그램 불균형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방 위원 역시 "메드베데바와 자기토바는 좋은 스케이터기는 하지만 아직 점프없이 프로그램을 끌어갈만큼의 능력은 없다. 그래서 좋은 기량에도 불구하고 연기가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같은 점수 인플레이션은 평창올림픽을 끝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방 위원은 "계속된 점수 폭등으로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역시 조정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PCS 채점에 대한 기준이 보다 엄격해질 것"이라고 했다. 가산점을 노린 점프의 후반부 몰아넣기 역시 "아직 정식 논의는 되지 않았지만, 이 역시도 개선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며 "개인적으로는 여자 싱글이 올림픽의 꽃이 되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기술 위주의 경쟁이 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설명했다. 결국 이번 올림픽을 끝으로 세계신기록 행진이 멈출 가능성이 높다. 지금의 분위기라면 23일 프리스케이팅에서 향후 몇년간 깨지지 않을 세계신기록이 세워질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드는 궁금증 한가지. 과연 김연아가 이번 평창올림픽에 뛰었다면 어떤 점수를 받았을까. 방 위원은 "단순 비교는 어렵다"고 대답을 피했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토바의 기록과 비슷하거나 이상 가는 점수를 올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밴쿠버 때의 연기라면 확신할 수 있다. 아니 아쉽게 은메달을 거머쥔 소치 때 연기도 마찬가지다.
강릉=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