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스 두쿠르스(34). 라트비아 출신으로 '스켈레톤계 우사인 볼트'로 불릴 정도로 지난 10년간 내리막을 몰랐던 선수였다.
2009~2010시즌부터 2016~2017시즌까지 국제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IBSF) 랭킹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소위 '넘사벽(넘어 서기 힘든 사차원의 벽)'이었다.
유전자가 남다르다. 봅슬레이 브레이크맨 출신인 아버지 다이니스 두쿠르스(64)는 라트비아 시굴다 트랙 매니저 겸 스켈레톤대표팀 코치를 맡고 있다. 형 토마스 두쿠르스(37)는 스켈레톤 현역 선수다. 올 시즌 부상에도 불구하고 IBSF랭킹 3위를 찍으며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맞이했을 만큼 월드클래스급 기량을 보유하고 있다. 두쿠르스는 그렇게 썰매 집안의 막내 아들로 자랐다.
하지만 두쿠르스의 '장기 독재'는 2017~2018시즌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1부리그 격인 월드컵에서 지난 10년간 보지 못했던 생소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3차 대회 6위와 6차 대회 5위였다. 물론 두 차례 1위와 세 차례 2위를 기록하긴 했지만 그의 IBSF랭킹은 4위였다. 굴욕적인 건 지난 두 시즌간 세계 2위에 머물렀어도 격차가 크다고 느꼈던, 소위 한 수 아래로 봤던 윤성빈(24·강원도청)이 마지막 월드컵 대회를 건너뛰고도 세계 1위를 달성한 것이다. 이번 시즌 '황제' 두쿠르스는 그야말로 발버둥치는 모양새였다.
두쿠르스의 부진을 두고 온갖 추측이 나돌았다. 첫째, 장비 문제였다. 윤성빈의 입에서 문제를 들을 수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성적이 좋지 않았던 대회 때는 썰매 날을 바꿔 잘 적응하지 못한 것 같더라." 둘째, 아버지 겸 코치에게서 받는 스트레스였다. 조인호 스켈레톤대표팀 감독은 "월드컵 현장에서 보면 아버지가 그렇게 두쿠르스에게 닥달을 하더라. 윤성빈이 1위를 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했을텐데 아버지까지 부담을 주더라. 심리적인 영향이 컸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셋째, 목표의식 부족이었다. 더 이상 오를 산이 없다는 건 성취감을 떨어뜨린다. 마지막으로 윤성빈의 메가톤급 성장도 한몫 했다는 분석이다. 윤성빈이 이번 시즌 7차례 월드컵에서 5차례 우승과 2차례 준우승을 거두면서 승부욕이 강한 두쿠르스에게 심리적 압박을 줬을 가능성이 높다.
7일 강원도 평창의 올림픽 슬라이딩 센터에서 두 차례 연습주행을 마친 뒤 가진 인터뷰에서 두쿠르스는 "부상은 없었다. 그저 평창올림픽만 바라봤다"며 애써 자신의 부진을 부인했다.
아이러니컬한 건 두쿠르스가 올림픽만 되면 작아진다는 것이다. 두쿠르스에게 평창올림픽은 개인통산 세 번째 올림픽이다. 그러나 아직 금메달이 없다. 2010년 밴쿠버 대회와 2014년 소치 대회에서 나란히 은메달에 머물렀다. 다소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지난 10년간 세계 정상을 지키면서도 올림픽 금메달이 없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자 두쿠르스는 "최선을 다할 것이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지켜보겠다"며 약간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윤성빈에 대해선 두말 할 것 없이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윤성빈은 매우 강한 선수"라며 엄지를 세운 두쿠르스는 "이번 평창올림픽의 메인 경쟁자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이어 "홈 이점을 가진 강한 선수고 올시즌도 매우 잘 치렀다"고 평가했다. 두쿠르스는 윤성빈을 설명할 때 '스트롱(strong)'이란 단어를 세 차례나 사용하기도 했다.
평창올림픽 스켈레톤 종목은 12일부터 펼쳐진다. 이제 두쿠르스는 올림픽 경기 전까지 두 차례 훈련, 네 차례 주행밖에 남아있지 않다. 현재 자신의 최고 기록보다 한참 뒤진 기록을 찍고 있는 두쿠르스는 꿈에 그리던 올림픽 금메달을 한 번도 목에 걸어보지 못하고 '비운의 천재'로 남게 될까.
평창=김진회 기자 manu35@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