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조지영 기자] 1987년 6월, 대한민국 현대사의 분수령이었던 6월 민주항쟁이 2017년 12월 극장가를 찾았다. 30년 전 광장에 모인 뜨거운 목소리가 30년 뒤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든 이들에게 외친다. 위로와 용기, 그리고 희망. 2017년 마지막을 장식할, 더할 나위 없는 웰메이드 항쟁극이 탄생했다.
1987년 1월, 스물두 살 대학생이 경찰 조사 도중 사망하고 사건의 진상이 은폐되자 진실을 밝히기 위해 용기 냈던 사람들의 가슴 뛰는 이야기를 다룬 휴먼 영화 '1987'(장준환 감독, 우정필름 제작)이 지난 13일 언론·배급 시사회를 통해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1987'은 오늘(14일) 개봉하는 첩보 액션 영화 '강철비'(양우석 감독, 와이웍스엔터테인먼트 제작), 오는 20일 개봉하는 판타지 액션 영화 '신과함께-죄와 벌'(이하 '신과함께1', 김용화 감독, 리얼라이즈픽쳐스 제작)에 이어 12월 대전을 펼칠 빅3 세 번째 주자다. 앞서 두 작품이 이틀간 차례로 뚜껑을 열었고 '1987'이 대미를 장식한 것.
'1987'은 1987년 1월 무고한 한 젊은이의 죽음, 졸지에 시신으로 돌아온 아들을 차갑게 언 강물에 흘려보내야 했던 아버지의 애끊는 비통함에 눈물짓게 하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경찰과 권력 수뇌부를 보며 분노하게 한다. 그리고 이런 분노와 신념이 광장으로 모여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요동치게 만든다. 고(故)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포문을 열고 고 이한열 사망 사건으로 마무리를 짓는 '1987'은 1987년 1월부터 6월까지 펼쳐진 비극의 역사를 올곧이 그려내 심장을 뛰게 만든다. 특히 촛불 혁명을 성공시킨 올해, 유독 와닿는 의미 있는 작품이 됐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은폐를 지시하는 대공수사처 박처원 처장 역의 김윤석, 박종철 화장 동의를 거부하고 부검을 밀어붙이는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환 검사 역의 하정우, 사건의 진실을 담은 옥중서신을 전달하는 교도관 한병용 역의 유해진, 87학번 대학 신입생 연희 역의 김태리, 박 처장의 부하이자 대공분실 조반장 역의 박희순, 박 처장의 오른팔 대공수사처 유과장 역의 유승목,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끝까지 매달리는 사회부 윤상삼 기자 역의 이희준 등이 영화의 굵직한 스토리를 이끈다.
또한 사건의 진상을 담은 문건을 정의구현사제단에 전하는 재야인사 김정남 역의 설경구, 사건의 축소 사실을 담은 옥중 서신을 김정남에게 내보내는 재야인사 이부영 역의 김의성, 박 처장의 뒤를 든든하게 봐 주는 정권 실세 안기부장 역의 문성근, 사건 은폐 책임자인 경찰 총수 치안본부장 역의 우현, 고문 도중 사망한 대학생 박종철의 아버지 역의 김종수, 박종철의 시신 부검에 입회한 삼촌 역의 조우진, 박종철 사건 기사를 최초 보도한 일간지 사회부장 역의 오달수, 윤 기자의 데스크 사회부장 역의 고창석,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중심이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스물두 살 대학생 박종철 역의 여진구와 정의에 맞선 또 다른 대학생 역의 강동원까지. 그야말로 충무로 최고의 라인업이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최고의 앙상블을 이뤘다.
'충무로 어벤져스'라 표현해도 부족하지 않았던 '1987'은 주·조연할 것 없이 적재적소, 빈틈없이 자신의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했다는 점이 가장 눈길을 끈다.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캐스팅 균형이 '1987'의 최대 미덕이다. 특히 대공수사처 박처장을 연기한 김윤석은 가히 역대급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역사책을 찢고 나온 듯한 싱크로율로 보는 이들의 치를 떨게 만든다. 또한 역사적 고증을 고스란히 따른 '1987'에서 유일한 가상의 인물이었던 연희 역의 김태리도 호연을 펼쳤다. 권력의 부당함을 잘 알지만 어느덧 상식처럼 돼버린 침묵에 동조하는 보편적인 시민이었던 연희. 마치 지금의 우리를 비추는 감정의 진폭을 디테일하게 표현해 몰입도를 높인다. 난생처음 시위대에 휘말려 맞닥뜨린 동아리 선배 강동원과 풋풋한 로맨스 역시 김태리 특유의 에너지로 활력을 불어넣었다.
'1987'에서 단 두 신(영정사진 제외) 등장한 박종철 열사를 연기한 여진구 역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눈빛과 몸짓만으로 공포에 질린 박종철을 표현한 여진구다. 그리고 박종철의 삼촌으로 조카의 시신을 직접 목도한 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과 슬픔을 연기한 조우진은 여진구 못지않게 짧은 등장이었음에도 강렬한 한방을 안겼다.
이렇듯 '1987'은 모든 균형이 완벽하게 조합된 웰메이드 항쟁극으로 관객을 찾게 됐다. 철저한 고증과 왜곡 없이 역사를 표현한 점이 무엇보다 보는 이들의 호감을 산다. 다수의 인물이 서로 촘촘하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격동의 드라마를 만드는 데 성공한 장준환 감독의 진심과 열정이 '1987'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1987'은 장준환 감독의 최고의 인생작이다.
올해 '공조'를 제외하고 성적이 좋지 않았던 CJ엔터테인먼트는 뒤늦게나마 '1987'로 자존심을 세웠다. 참담했던 '군함도'(류승완 감독) '남한산성'(황동혁 감독)의 굴욕을 '1987'로 만회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1987'은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박희순, 이희준, 그리고 강동원, 설경구, 여진구가 가세했고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카멜리아'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오는 27일 개봉한다.
soulhn1220@sportschosun.com 사진=영화 '1987' 스틸 및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