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이 17년 같습니다."
김보경(26)의 에이전트인 이영중 이반스포츠 대표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잉글랜드 챔피언십(2부리그) 입단 문턱에서 좌절했던 김보경이 네덜란드에서 도전을 준비 중이다. 김보경은 17일(한국시각)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디펜딩챔피언'인 PSV에인트호벤(이하 PSV) 팀 훈련장인 데에드강에 모습을 드러냈다. PSV는 박지성과 이영표, 거스 히딩크 감독의 향수가 진하게 남아 있는 팀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김보경의 깜짝 등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보경이 블랙번에서 PSV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을 짚어봤다.
▶1주일을 고민한 PSV의 초대
이 대표는 "PSV의 연락을 받은 게 8일 전"이라고 밝혔다. PSV는 17일부터 20일까지 왕복 항공료와 체제비를 모두 지원하는 조건이 담김 초청장을 김보경 측에 보냈다. PSV는 지난 시즌 에레디비지에 우승으로 2015~2016시즌 유럽챔피언스리그 본선 출전권을 따냈다. 현역시절 네덜란드 대표팀 스타 출신인 필립 코쿠가 지휘봉을 잡고 있다. 하지만 올 시즌 핵심 공격수인 맴피스 데파이가 맨유로 이적한 데 이어 조르지오 바이날둠(뉴캐슬), 오스카 힐예마르크(팔레르모) 등 주전 선수들이 잇달아 이적하면서 구멍이 생겼다. 중앙과 측면 모두 커버가 가능한 김보경을 주시한 이유다. 코쿠 감독은 김보경이 카디프, 위건에서 활약했을 당시 영상을 10편 가까이 보며 가능성을 점쳤다. 하지만 이적 선수들의 대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영상 관찰 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일본을 거쳐 잉글랜드 무대에서 오랜 시간 활약했던 김보경이 전혀 다른 무대인 네덜란드의 환경과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궁금증도 작용했다.
이 대표는 "김보경이 블랙번 이적이 좌절된 뒤 마음고생이 심했다. 때문에 PSV의 '초청'보다 확실한 '제안'을 원했던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PSV의 뜻이 완강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마다할 제안이 아니라는 판단에 수락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선덜랜드-스완지 고사 뒤 찾아온 '블랙번의 악몽'
PSV의 초청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블랙번 입단 좌절의 트라우마가 컸다. 블랙번은 지난달 31일 김보경의 취업비자(워크퍼밋) 발급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잉글랜드축구협회와 정부가 자국 선수 보호를 위해 강화한 외국인 선수 취업비자 발급 조건을 넘지 못했다. 블랙번과 김보경 측 모두 변호사까지 나서 문제 해결을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굳게 닫힌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이 대표는 "지난달 30일 이미 블랙번과 입단 계약서에 사인을 마쳤다. 게리 보이어 블랙번 감독은 특히 김보경을 챙겼다. 챔피언십 시절의 활약 때문이었던 것 같다. 계약서 사인을 마친 뒤 등번호 7번이 박힌 유니폼도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런 가운데 입단이 좌절되니 선수의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1주일이 지난 뒤부터는 굉장히 힘들어 했다"고 털어놓았다.
프리미어리그(EPL)의 제안까지 마다하면서 달렸던 블랙번행이었다. 이 대표는 "사실 블랙번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선덜랜드와 스완지시티의 제안도 받았었다"고 고백했다. 선덜랜드는 2006년 독일월드컵 당시 A대표팀을 이끌었던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다. 2011년 지동원(현 아우크스부르크) 영입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스완지시티는 슈틸리케호의 캡틴 기성용의 소속팀이다. EPL 소속이라는 점만 해도 블랙번에 비해 메리트가 있었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블랙번이 워낙 적극적이었던 반면, 선덜랜드와 스완지시티는 김보경을 백업 멤버 정도로 생각했다"고 블랙번을 택한 이유를 밝혔다.
▶50%의 가능성, 결론은?
김보경은 20일까지 에인트호벤에 머물면서 코쿠 감독 및 PSV 선수들과 호흡을 맞춘다. 분위기는 긍정적이다. 이 대표는 "첫 훈련에 앞서 코쿠 감독이 미팅을 제안했다. '네 실력에 대해선 확실히 알고 있고, 인정한다. 다만 네가 이 곳에서 분위기를 느끼고 우리 팀의 제의를 생각할 시간을 갖길 바라는 마음에서 부른 것'이라고 하더라"고 밝혔다. 그는 "초청 기간이 20일까지인 만큼, 그 안에는 어떻게든 결론이 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PSV만 김보경을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PSV와 같은 에레디비지에의 중상위권 팀과 프랑스 리그1, 독일 분데스리가팀 역시 여름 이적시장 막판 김보경의 움직임을 주시 중이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유럽챔피언스리그 본선을 뛰는 위치나 조건 등 여러 면에서 PSV가 가장 좋은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물론 판단은 김보경 만의 몫이 아니다. PSV는 김보경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방침이지만, 자체적으로 팀 내 가능성 및 상품성 등 세세한 부분을 체크 중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PSV 입단이 좌절될 수도 있는 것이다.
PSV 입단이 좌절될 경우 김보경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J리그 복귀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떠오르고 있다. J리그는 8월 초 추가 선수 등록이 마감된 상태다. 그러나 자유계약(FA)신분 선수에 한해서는 오는 9월 19일까지 등록이 가능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유럽 대부분의 리그와 같은 방식이다. FA신분인 김보경이 유럽에 남아 도전할 가능성도 있지만, 세레소 오사카 시절 재능을 드러낸 J리그에서의 와신상담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원칙은 유럽에 남아 도전을 계속하는 것"이라면서도 "어정쩡한 팀에 자의반 타의반 이적하기보다 선수의 가치를 가장 잘 알아주는 곳으로 가는 게 최선의 선택이다. J리그행도 그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