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은 서로를 살찌운다. 매번 서로를 박살내야하는 숙적과는 약간 다른 의미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시선은 자꾸만 돌아가고, 주위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면 그때부터는 오히려 성가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벌은 한계를 뛰어넘는 촉진제다.
'피겨 여왕' 김연아에게 주니어시절 아사다마오(일본)는 라이벌이었다. 대회마다 마주쳤던 둘, 세월이 흐르면서 아사다마오는 김연아를 따라잡지 못했지만 좋은 시설, 좋은 스텝,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아사다마오를 보면서 김연아는 어금니를 깨물곤 했다. 훗날 "라이벌이 있어 성장할 수 있었다"는 진정한 승자의 말도 했다. 레전드의 업적을 더듬다보면 자주 라이벌을 발견한다. NBA의 전설인 래리 버드와 매직 존슨이 그랬고, 축구계의 거성인 '외계인'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세기의 라이벌이다.
올시즌 프로야구 최고 상품으로 꼽히는 박병호(넥센)와 테임즈(NC)는 멋진 라이벌이다. 그것도 역대급이다. 둘은 11일과 12일 목동에서 맞닥뜨렸다. 둘의 방망이는 눈부실 정도였다. 박병호는 이틀간 3연타석 홈런으로 41홈런을 찍었고, 테임즈는 올시즌 2호 사이클링히트에 10타석 연속출루의 진기록도 보여줬다. 박병호가 3개의 홈런, 테임즈가 2개의 홈런을 쏘아올렸다. 1루에서 라이벌의 홈런과 안타를 바라보고는 곧바로 홈런과 안타로 응수하는 박진감 넘치는 대결이 펼쳐졌다.
테임즈는 박병호와의 경쟁이 "재미있고, 흥미롭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엄청난 파워스윙으로 박병호가 홈런을 날리자 글러브를 입에대고 키득 키득 웃기도 했다. 말도 안되는 스윙에 말도 안되는 궤적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박병호 역시 테임즈 앞에서 더욱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둘은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을 양분하고 있다. 테임즈가 타율 1위(0.387) 홈런 2위(37개) 타점 2위(105) 득점 1위(104) 안타 3위(132) 출루율 1위(0.500) 장타율 1위(0.827)를 기록하고 있다. 박병호는 타율 3위(0.351) 홈런 1위(41) 타점 1위(108) 득점 2위(97) 안타 1위(140) 장타율 2위(0.734) 출루율 4위(0.435)를 각각 마크중이다. 누굴줘도 MVP로 손색이 없고, 골든글러브 투표는 이미 박빙싸움을 예고하고 있다.
이제 박병호는 사상 첫 2년연속 50홈런 도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테임즈는 역대 최고의 장타율 달성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역대 장타율 1위는 프로원년 백인천의 0.740이다. 테임즈의 장타율은 0.827이다. 역대 출루율 신기록(82년 백인천 0.502)도 경신할 조짐이다. 프로원년과 지금은 야구 수준이나 시스템에서 큰 차이가 있다. 테임즈의 기록이 훨씬 대단하다는 평가다.
'영원한 홈런킹' 이승엽(삼성)을 보면 라이벌이 미치는 긍정효과를 알 수 있다. 1997년 21세 이승엽은 32홈런으로 홈런왕에 등극했다. 이듬해 한국프로야구는 외국인선수에 문호를 개방했다. 타이론 우즈(두산)는 오자마자 42홈런으로 장종훈(1992년)의 41홈런 신기록을 경신했다. 이승엽은 38홈런으로 우즈가 왕관을 쓰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듬해 이승엽은 역사적인 50홈런 시대를 열며 54홈런으로 라이벌을 압도했다. 이후에도 우즈와 이승엽은 서로 장난을 치며 안부를 묻는 좋은 라이벌이었다. 2002년과 2003년 심정수(현대)와 이승엽(삼성)은 치열한 대결로 둘다 기념비적인 시즌을 보냈다. 2002년 이승엽이 47홈런, 심정수가 46홈런. 2003년 심정수는 53홈런, 이승엽은 56홈런으로 아시아홈런 신기록을 갈아치웠다. 라이벌과의 경쟁을 통해 이승엽은 부단히 자신을 개조하고, 스윙을 다듬어갔다. 이 결과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박재호 기자 jhpar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