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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곤옥 새벽집 대표 "부도 후 30평의 기적…음식에 문화 입히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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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에 하던 사업은 부도가 났다. 지방 출신으로 고향에 뼈를 묻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부도난 회사의 사장을 받아줄 곳은 없었다. 살아보기 위해 서울행을 택했다. 30평에서 기적을 만들어 낸 박곤옥 새벽집 대표의 이야기다.

▶월매출 30만원에서 연매출 150억원으로 성장

새벽집은 현재 연매출 15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웬만한 중소기업과 맞먹는 매출액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 하나. 새벽집이란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박곤옥이란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신은 장사꾼에 불과하다며 음식장사꾼은 맛하나로 승부해야 한다고 자신을 낮춰왔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박곤옥 대표와 만남은 우연찮은 기회에 이뤄졌고 그의 스토리를 공개하기로 했다.

박 대표는 1984년 서울 청담동에 30평 남짓한 가게를 열었다. 청담동이 지금은 부촌의 상징이 됐지만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에 있는 것이라고는 나이트클럽 두개가 전부였다.

"서울에 올라와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니 자금이 문제였습니다. 저렴한 임대료를 찾던 중 청담동이란 곳을 알게 됐고, 당시만 해도 청담동은 허허벌판이었죠. 있는 것이라고는 당시 나이트클럽 2개가 전부였으니까요."

새벽집의 시작은 초라했다. 30평 남짓의 매장에서 콩나물국밥을 팔았다. 나이트클럽을 찾는 이들을 고객의 전부였다. 그렇다 보니 24시간 영업을 해도 월 매출 30을 넘기기 힘들었다. 주변 상권이 형성되지 않아 사람이 적은 탓에 장사가 안 된다며 포기를 할까 고민도 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음식의 품질을 높였다. 음식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맛있는 음식을 팔면 자연스레 손님이 찾을 것이라며 자신을 고쳐 잡았다.

창업에 성공을 하려면 특별한 무기가 있어야 한다. 박 대표의 무기는 '질'이었다. 콩나물국밥과 함께 판매하던 소고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30평 작은 매장에서 올린 월매출은 콩나물 국밥보다 고기판매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가격대가 저렴한 콩나물국밥은 테이블 회전에 따라 매출이 결정되지만 고기의 경우 테이블 회전이 적어도 나름대로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장사를 할 거라면 제대로 된 재료를 갖고 장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국내에서 최고 좋다는 소고기를 찾아 전국을 헤맸죠. 그렇게 택한 게 지금껏 사용하고 있는 강진 암소입니다. 가격은 다른 것에 비해 비싸지만 품질과 맛은 자부할 수 있었거든요."

어디서 본 듯한 전략이다. 최고급을 내세운 갤럭시S시리즈와 아이폰 시리즈의 전략. 자본을 바탕으로 해야 가능한 일을 그는 직접 발품을 팔아 해결했다. 규모가 작았던 초창기를 생각하면 힘들었지만 재미가 있다는 박 대표. 그는 "새벽에 고속버스를 타고 강진에 내려가 아이스박스에 소고기를 담아 서울로 바로 올라오기를 수차례 반복했었다"며 "힘이 들 때면 항상 맛있다는 고객의 말로 위안을 삼았다"고 말했다. 판매 방식의 혁신이 지금의 새벽집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박 대표는 메뉴개발에도 신경을 썼다. 질 좋은 소고기를 활용할 것을 찾다 육회비빔밥을 만들었다. 전주와 진주식이 아닌 '청담식 육회 비빔밥'의 탄생이다.

"유명한 곳들을 모두 다녀봤지만 제 입에는 맞지 않았습니다. 내 입맛에 맞는 육회 비빔밥을 만들어 보자고 결시 한 뒤 시작했죠. 아내의 까다로운 입맛도 한몫 거들었습니다."

질 좋은 소고기를 판매한다는 입소문에 식당을 찾는 이들은 꾸준히 늘었다. 높은 가격과 쉽지 않은 접근성을 가진 곳까지 찾는 이들이 늘었다. 육회 비빔밥의 경우 하루 평균 4000그릇이 팔려나간다. 게다가 연예인들이 식당을 찾으며 연예인 식당이란 꼬리표도 달게 됐다. 새벽집은 레이디가가가 한국 방문 당시 찾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새벽집에서는 음식점에 흔히 붙여 놓는 연예인 사인 한 장을 찾기 힘들다.

"연예인 등을 내세워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결같이 좋은 품질을 사용하고 비슷한 맛을 내는 식당으로 알려지는 게 좋지요."

그래서일까. 박 대표는 연 매출 150억원을 올리고 있는 지금도 가락동 새벽시장을 직접 찾고 좋은 품질의 재료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1년째 가락동 새벽시장을 직접 찾아 신선한 재료 구입을 진두지휘 하고 있어요. 당시 티코란 작은 차에 짐을 한가득 싣고 다녔습니다. 지금은 용달차를 이용해 재료 이송이 수월해졌지만 예전엔 정말 힘들었습니다."

용달차가 편하다는 박 대표. 그는 독일 모 회사의 최고급 승용차를 구입해 타기도 했지만 맞지 않는 것 같아 팔았다고 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 보다 내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업 시작 이후 프랜차이즈 사업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가게 이름을 빌려 창업에 나서려는 사람들에게 모진 말도 많이 했어요."

박 대표는 음식 장사만큼 어려운 사업이 없다고 했다. 음식점 창업에 나서면 웬만하면 생활은 유지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가는 망하기가 십상이다.

"음식점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어요. 사람 관리도 쉽지가 않죠. 재료 준비에서부터 모든 음식을 직접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선 맛있는 음식 재료에 대한 지속적인 공부도 필요합니다."

▶앞치마 못 벗는 아저씨 "음식에 스토리 입히고 싶어"

박 대표의 꿈은 새벽집에 스토리를 입히는 것이다. 단순히 고깃집을 넘어 색다른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문화는 살아 숨 쉬며 단절되는 법이 없다. 연속성을 갖추고 있다.

새벽집의 운영방식에는 그의 생각이 담겨 있다. 손님을 많이 받기 위해 테이블을 많이 놓는 대신 사람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개별 공간형태의 매장을 구성해 운영 중이다.

"청담동에서 새벽집을 오픈 한 이후 20년간 9개의 옆 가게를 인수했지만 다른 지역에 새로운 매장을 열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음식에 문화를 입히기 위해선 혼자의 힘으론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많은 고객들과 함께 해야 가능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죠."

그는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새벽집 창업 이후 처음으로 양재동 포이점을 오픈했다. 양재동 포이점은 외관부터가 특이하다. 음식에 문화를 입혀보겠다는 박 대표의 의지를 반영, 음식점 2층에 찰리채플린 모자를 씌웠다. 고깃집과 어울리지 않은 외관이다. 내부도 마찬가지다. 유명 레스토랑에 온 듯 한 분위기로 매장을 꾸몄다.

메뉴는 청담동 매장과 비슷하지만 새로운 메뉴를 추가했다. 일종의 테스트 메뉴로 소비자에게 색다른 맛의 즐거움을 주기 위해 기획됐다.

"양재 포이점을 시작으로 상권에 맞는 2~3개 매장을 더 열어 볼 계획입니다. 음식도 문화처럼 살아 숨 쉰다고 생각합니다. 비싸다고 좋은 게 아니죠. 일본의 고급 스시가 회전초밥과 포장 초밥으로 대중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처럼 최고급 소고기의 요리를 가지고 형태 변화를 통해 새로운 맛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습니다."

박 대표는 소위 잘 나가는 장사꾼이다. 도전보다는 안정을 택할 나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 포이점과 청담점을 하루에도 수차례 오가고, 재료 손질부터 고기 손질까지 손수한다. 아직도 앞치마를 두르고 있어야 편하다는 박 대표. 그는 많은 사람과 함께 음식에 문화를 입히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많은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김세형 기자 fax123@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