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구, 조금 늦었습니다. 고등학생들에게 사인을 좀 해주느라…."
배우 손현주가 머리를 긁적이며 들어선다. 인터뷰 중간 휴식 시간에 잠시 봄볕을 쐬러 나갔다가 때마침 하교하던 고등학생 무리를 만난 모양이다. 자신의 인기를 은근슬쩍 자랑하는 손현주의 푸근한 웃음에는 전염성이 있다. 덩달아 미소가 번진다. '귀요미 중년'이란 단어를 선물해주고 싶은 배우.
TV 드라마에서 아줌마 시청자들에게 욕깨나 먹던 시절이 마치 아주 먼 옛날 일 같다. 무능한 가장이거나 아내 몰래 바람 피우는 못난 남편 캐릭터. 슬그머니 잊혀졌다. 언젠가부터 손현주에겐 '한국의 리암 니슨'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최근 몇 년 사이의 변화다. 드라마 '추적자', '황금의 제국', '쓰리데이즈',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숨바꼭질' 등에 연이어 출연하면서 손현주는 스릴러 장르를 대표하는 배우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4일 개봉하는 영화 '악의 연대기'와 한창 촬영 중인 영화 '더 폰'도 스릴러다. 중년 배우가 이처럼 전혀 다른 이미지로 활동 영역과 장르를 넓힌 사례는 극히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손현주는 '영화계의 뒤늦은 재발견'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고등학생 팬들이 그를 알아보는 것도 당연지사.
한 작품을 온전히 책임진 주연배우지만 손현주는 여전히 소탈하다. "주연 타이틀 욕심은 전혀 없고, 그런 생각을 했다가는 스스로 무너져버릴 것"이라며 자신을 낮춘다. '악의 연대기'를 재밌게 봤다고 아무리 말해줘도 "손익분기점만 넘기면 한숨 돌리겠는데 지금은 사실 두렵다"며 근심 어린 표정이다. 안방극장에 장르물 열풍을 불어온 '추적자'의 주역이자 '숨바꼭질'의 깜짝 흥행을 이끈 '한국의 리암 니슨' 손현주의 기우다.
손현주는 "시나리오가 재미있어서 '악의 연대기'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영화도 손현주 연기에 빚을 졌다. 손현주는 갑상선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었지만 카메라 앞에서 몸을 내던졌다. "제가 갑자기 수술을 받게 돼서 크랭크인이 한 달 늦어졌어요. 그런데도 동료들이 다 기다려줬어요. 정말 미안하고 고맙죠. 몸이 온전하진 못했지만 내가 좋아서 선택한 작품이니 잘 마무리 짓고 싶었습니다."
'악의 연대기'에서 펼친 형사 연기. 그에겐 세부 전공 분야다. 형사 연기만 15년 했다는 손현주는 '악의 연대기'에서도 명불허전 연기를 펼쳤다. 특진을 앞두고 괴한에게 납치돼 우발적으로 살인을 하게 된 최창식 반장.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의 수사 책임자가 된 최반장은 남모르게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한다. 최반장의 불안한 심리를 따라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손현주는 온 몸으로 열연을 펼쳤다. 심지어 눈의 실핏줄로도 연기했다. 찌푸려진 미간에선 번뜩이는 살기까지 느껴진다. 손현주가 만든 긴장감이 러닝타임 내내 숨통을 조여온다.
좁고 어두운 골목길에서의 추격신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액션배우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해야 할까. "저는 설렁설렁 뛰면 티가 나요. 얼굴이 평범해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뛰어야 해요. 그러다 한번은 카메라에 부딪히기도 했죠. 앞으로도 대충대충 하는 역할은 안 들어올 거 같아요.."
앞뒤 안 가리고 연기한 손현주지만 사실 이번 캐릭터는 소화하기 쉽지 않았다. 동료들에게 진실을 감추고 속여야 하는 최반장의 상황이 연기적으로도 심리적 압박이 됐다. "불안한 심리를 너무 감추면 냉혈한 같고, 그렇다고 다 드러낼 수도 없고. 그 간극을 조율해 표현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어요. 솔직히 감정이 소진된 적도 많았습니다. 한번은 눈을 클로즈업한 장면을 찍는데, 감독이 저더러 많이 움직이지 말고 슬픔, 분노, 좌절, 회한 등 8가지 감정을 눈빛에 다 담아달라고 하더군요. 감독님이 한번 해보시라고 하면서 웃고 넘어가긴 했는데, 어려운 연기를 시키는 감독이 조금은 밉기도 했어요."
눈빛 하나에 수많은 감정을 담아내는 연기는 어떻게 나오는 걸까. 정교한 설계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명배우 손현주의 연기론이 궁금했다. "저는 원래 촬영하고 나서 모니터를 잘 안 해요. 자칫하면 연기할 때 폼을 잡게 되거든요. 그러니 계산된 연기는 할 수가 없죠. 큰 테두리만 그려놓고 그 안에서 줄타기 하는 심정으로 연기를 합니다. 지금껏 그래 왔어요. 배우가 극 안에 뭔가를 만들어 보여주려 하면 관객에게 금방 들키게 돼요."
멋 부리지 않은 편안함, 일상과 호흡하는 생활형 연기, 무엇보다 푸근하고 서민적인 감성이 손현주 연기색의 원천이다. 손현주 표 스릴러가 힘이 강한 것도 그의 연기가 늘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오는 시나리오의 70%가 스릴러물이라고 한다. '악의 연대기' 이후 만나게 될 신작 '더 폰'도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번 영화를 마치면 가벼운 장르의 작품도 하려고요. 딸이 고등학생, 초등학교 6학년이니까 청소년관람가 작품을 찍어야죠. 하하." 김표향 기자 suza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