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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 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승자의 심리학'을 통해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역설한 데니스 웨이틀리는 "패배자들은 과거에 살지만 승리자들은 과거로부터 배워 미래를 위해 현재에 노력하는 것을 즐긴다"고 말했다. 현 시점에서 미래를 위해 해석되는 과거만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뜻.
지난 28일, 1일 이틀간 방송된 KBS 1TV 삼일절 특집 2부작 드라마 '눈길'(극본 유보라, 연출 이나정)은 그런 측면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드라마가 메시지를 꼭 담고 있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찬반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삼일절 특집 드라마라면 국물만 있지 않았으면 했다. 무언가 사회적 메시지라는 목에 걸릴만한 걸쭉한 건더기가 들어 있기를 바랬다. 적어도 이 드라마는 그 바람을 충족시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이 드라마는 세가지 문제에 대해 '눈길'(극 제목의 '눈길'은 어린 두 주인공이 생사의 경계에서 밟고 지난 눈이 쌓인 길일게다. 중의적 의미가 내포돼 있는지 모르겠으나…)을 던졌다. 우선,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위안부 문제, 둘째, 독립운동가의 후손 문제(간접적으로 살짝), 세째, 세대 간 소통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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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운동가와 친일 부역자의 후손에 대한 풀리지 않는 화두도 주인공의 상황을 통해 간접적으로 던졌다. 강경에서 곱게 자라던 영애(김새론)는 독립운동을 하다 적발돼 죽음을 당하는 아버지로 인해 위안부로 끌려가 고초를 겪다 결국 꽁꽁 언 타지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는다. 국가라는 측면에서야 당연히 영애의 아버지는 거룩한 희생을 했다. 하지만 오직 한 가정의 파괴란 측면(특히 연좌죄에 연루된 어린 자식의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을수도, 미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일제 치하란 시대적 입장에서 어쩌면 당연한 감정일 수 있다. 심지어 어른들 조차 시류에 편승해 부끄러운 친일 행각을 서슴지 않았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청산되지 않은 역사 속에 독립운동가와 친일부역자의 후손의 현재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제작진은 불량소녀 은수(조수향)를 통해 세대 간 소통 문제도 던진다. 가족이 없어 사회의 보살핌으로부터 소외된 소녀 은수를 이해하는 어른은 일제 강점기에 상처를 받은 노인 종분(김영옥) 뿐이다. 아파본 사람만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휴머니즘적인 시각으로 풀어낸다. 종분의 아픈 삶에 격하게 공분하는 사람이 바로 은수라는 지점에서 드라마는 시선을 확장해 청소년 문제 역시 사회적 책임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비록 할머니와 불량소녀 간 갈등을 극대화 시키는 장치를 동원하지 않았지만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53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의 미해결 과제가 미래세대에게 이어져야 한다는 당위성 만큼은 확실히 전달한 셈이다.
다시 역사 문제로 돌아가보자. 위안부 문제는 결코 "천하에 나쁜 놈들"이란 격한 일회성 분노로만 넘길 수 있는 과거사가 아니다. 백번 양보해 실증사관에 입각해도 반드시 청산돼야 할 과거다. 침체된 경제상황과 인구 노령화 속에 의도적으로 우경화의 극단을 걷는 일본 집권세력의 왜곡된 의도에 우리의 현재와 미래세대가 맞설 수 있는 역사적 관점을 갖춰야 비로서 진정한 미래의 역사 속으로 새로운 걸음을 옮길 수 있다. 우리가 처한 현재는 언제든 차갑게 얼어버릴 수 있는 위태로운 눈길이기 때문이다. 강추위 속에 눈밭을 구르며 성인 연기자를 능가하는 열연을 펼친 김새론 김향기, 두 어린 여배우에게 애처로움과 함께 큰 박수를 보낸다.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미래를 이끌어가야할 두 연기자. 보람 있는 일을 했다.
엔터테인먼트 팀장 hschung@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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