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배구 개막특집③]'부드러운 카리스마' 가빈 VS '독설가' 안젤코 입심대결

김진회 기자

기사입력 2011-10-17 09:29


◇삼성화재의 용병 가빈 슈미트는 스포츠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직접 머리카락을 손질한다고 밝혔다. 국내 미용실에선 자신이 원하는 헤어스타일을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다. 손질방법은 '비밀'이라고 했지만, 이내 공개했다. 사진제공=삼성화재 블루팡스.

마치 만화같았다. 아무도 쓰러뜨릴 수 없을 것같은 느낌이었다. 지난 2년간 한 선수가 국내 코트를 지배했다. 블로커들보다 손 하나가 더 높은 곳에서 내뿜는 스파이크는 어김없이 코트에 내리꽂혔다. 그를 막을 자는 없었다. 선수들 사이에선 '공공의 적' 또는 '괴물'로 불렸다. 사이버상에서 주로 사용하는 '갑인'(甲人·특정 분야에서 압도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인터넷 용어)으로도 통했다. 주인공은 가빈 슈미트(25·삼성화재)였다. 그가 또 다시 국내 무대를 밟는다. 지난 7월 삼성화재와 재계약에 성공했다. 그동안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상대팀들은 또 다시 넋놓고 '가빈쇼'민 구경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대항마가 필요했다. 이때 KEPCO45가 웃었다. 삼성화재를 알고, 한국배구를 잘 아는 푸른 눈의 용병을 발빠르게 영입했다. 바로 '원조 괴물' 안젤코 추크(28·KEPCO45)였다. 공교롭게도 둘은 전현직 삼성화재 출신이다. 특히 삼성화재의 정규리그 4연패를 이끈 주역들이라 점에서 흥미롭다. 2011~2012시즌 최고의 라이벌이 될 조건을 갖춘 두 선수를 각각 경기도 용인시와 의왕시에 위치한 삼성화재와 KEPCO45 코트에서 만났다.


◇KEPCO45 용병 안젤코 추크가 13일 스포츠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가빈(삼성화재)은 지난해만 최고였지만, 나는 2년간 최고였다. 11년간 프로생활을 한 내가 경험에서 앞설 것"이라며 가빈과의 맞대결에 강한 자신감을 나타냈다. 인터뷰가 끝난 뒤 주먹을 불끈쥐고 파이팅을 외치고 있는 안젤코. 용인=김진회 기자
입심대결은 안젤코의 판정승?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독설가'의 충돌이었다. 두 선수가 서로를 얼마나 잘 아는지 궁금했다. 우선 가빈은 안젤코를 비디오에서 한번봤다고 했다. 가빈은 "비디오에서 봤는데 좋은 선수라고 느꼈다"고 짧게 밝혔다. 안젤코도 가빈의 플레이를 실전에서 단 한번 밖에 보지 못했다고 했다. 안젤코는 "(가빈은) 공격적인 면이 뛰어난 선수였다"고 말했다. 립서비스였다. 폭풍전야에 불과했다. 둘은 서로에 대한 평가를 이끼면서도 은근히 라이벌 구도에 신경쓰는 모습이었다. 가빈은 뼈있는 농담으로 안젤코를 자극했다. "스파이크는 바깥으로 때리고, 서브는 네트로 날려라." 지난시즌 미디어데이에서 건넨 농담을 안젤코에게 그대로 전했다. 가빈 특유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뽐낸 것이었다.

그러자 안젤코는 독설로 자존심을 세웠다. 안젤코는 "11년간 프로생활을 한 내가 가빈보다 경험 면에서 낫지 않겠나. 가빈의 정보를 특별히 알 필요는 없다. 삼성화재는 같은 스타일의 훈련과 배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배구는 코트 안에서 6명이 융합돼 하는 운동이다. '몰빵배구'는 배구가 아니다. 오히려 1~2명의 선수만 막으면 되는 것이라 더 쉬울 것"이라며 신경전을 펼쳤다. 이어 "한명의 용병이 60%가 넘는 공격점유율을 보이는 것은 어느 리그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며 독설의 강도를 높였다. 안젤코는 기록 부문에서도 가빈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나는 2년 동안 최고였는데, 가빈은 지난해만 최고였다"고 강조했다. 안젤코는 공격수의 잣대를 평가할 수 있는 득점상과 서브상을 2007~2008시즌과 2008~2009시즌 연속으로 수상한 바 있다. 반면 가빈은 2009~2010시즌 득점상, 서브상을 받았지만, 2010~2011시즌에는 득점왕 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2009년 4월 7일 삼성화재-현대캐피탈의 V-리그 챔피언결정전. 삼성화재 소속이던 안젤코가 동료들과 포옹하며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스포츠조선DB
안젤코가 일본에서 실패했다고?

안젤코는 2008~2009시즌을 마무리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안젤코는 삼성화재에서 인센티브를 제외하고 연봉만 16만유로(약 2억6000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도요다 고세이 트레푸에르자에선 30만유로(약 4억8000만원)을 제시했다. 몸값 차이가 컸다. 안젤코는 삼성화재와의 협상 중에도 유럽에서 뛰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지만, 결국 거액을 베팅한 일본에 둥지를 틀었다. 그런데 안젤코의 성적은 국내에서 뛸 때와 비교하면 초라했다. 24경기에 출전, 득점 5위(451점)와 공격성공률 7위(49.9%)에 그쳤다. 국내팬들의 체감과 달리 결코 부진한 기록이 아니었다. 철저한 분업화 배구를 펼치는 일본은 모든 일정이 국제대회에 맞춰져 있다. 그렇다보니 국내 리그는 단시간에 많은 경기를 치러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 팀 내 열정도 부족했다. 선수들 중 회사 직원 신분인 선수들이 많았다. 이들은 승패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단다. 승부욕이 강한 안젤코로서는 프로의식이 결여돼 있는 도요다 선수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안젤코는 "물론 일본배구가 한국보다 빠르고 세계 흐름에 발맞춰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있던 팀은 열정이 부족해보였다. 훈련 도중 선수들과 감독이 실수를 해도 웃음으로 넘어갔다. 다시 해보겠다는 열망이 없었다. 훈련량도 적었다"고 회상했다. 그래도 안젤코는 여태껏 단 한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적없는 팀을 3위까지 끌어 올렸다는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삼성화재 가빈 슈미트. 스포츠조선DB
누가 진정한 한국형 용병인가


시즌 개막이 얼마남지 않아서 였을까. 가빈과 안젤코의 눈빛에는 의욕이 넘쳤다. 실전을 방불케하는 훈련에선 진지함이 가득했다. 가빈은 지난 2년간 이미 완벽한 한국형 용병으로 거듭났다. 훈련 시에는 코트에 떨어진 동료들의 땀을 직접 닦는가 하면 실전에선 주장을 자청하기도 한다. 선수들의 집중력이 떨어질 때쯤 "집중해, 집중해"를 외치며 동료들을 독려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과도하게 공격이 몰리다보니 부하가 걸리기도 한다. 고통 해소는 한방요법을 사용한다. 부항을 뜬다. 경기에선 부항자국이 선명한 가빈의 어깨를 볼 수 있다. 한국문화에도 이미 적응을 끝냈다. 바베큐, 갈비도 잘 먹지만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 누룽지일 정도로 한국인이 다 됐다. "한국이 좋다. 감독님과 동료들이 너무 좋다. 2년간 생활했기 때문에 가족같다"는 가빈이다. 안젤코 역시 아시아권에서 네 시즌째를 보낸다. 1년 만에 돌아온 한국이고 새로운 팀이지만, 선수들과 금새 친해졌다. 자신이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장난도 치고 농담도 건넨다. 얼굴엔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의 식성은 한국인 못지 않다. 오히려 한국인보다 매운 것을 더 잘 먹는다. 매운 김치찌개를 비롯해 닭갈비. 감자탕. 부대찌개 등 가리는 음식이 없다. 단, 보신류 음식은 피한다. 안젤코는 "KEPCO45와 계약하기 전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내가 한국무대로 복귀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1년을 뛴 뒤 1년 더 계약하길 갈망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코치를 하고 싶다는 안젤코다.


가빈. 스포츠조선DB
가빈은 안젤코보다 행복한 사나이

가빈은 안젤코보다 행복한 사나이다. 가진 것이 많다. 우선 신체조건이 월등히 뛰어나다. 배구에선 1㎝의 신장차도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런데 둘의 신장차는 무려 7㎝나 차이가 난다. 가빈이 크다. 점프력으로 만회가 되긴 하지만, 80㎝의 평균적인 서전트점프력을 보유하고 있는 가빈의 타점은 국내 최고다. 375㎝다. 그동안 안젤코도 높은 타점에서 스파이크를 시도했지만, 최정점은 360㎝이다. 결론적으로 가빈이 안젤코보다 15㎝ 더 위에서 공격을 할 수 있다. 팀 전체적으로도 가빈이 앞서있다. 조력자들이 많다. '돌도사' 석진욱이 수술 재활 끝에 돌아왔고, 주장 고희진 세터 유광우 리베로 여오현 등 지난시즌 우승멤버들이 건재하다. 그러나 안젤코는 자신이 팀을 이끌어야 하는 힘든 입장이다. 신춘삼 KEPCO45 감독도 "우리팀은 아직 외인구단에 불과하다. 조직력이 50~60% 수준 밖에 올라오지 않았다. 안젤코가 실질적인 주장처럼 팀을 리드해야 한다"고 설명할 정도다. 심리적으로 부담이 커질 수 있다. 훈련 환경도 삼성화재에 비교해 천양지차다.

용인·의왕=김진회 기자 manu35@sportschosun.com

:) 당신이 좋아할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