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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대한체육회가 혁신위원회를 구성한다고 밝힌 후 엘리트 체육인들로부터 여러 통의 문자와 전화를 받았습니다.
역시 메달리스트 출신인 원로 체육인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불과 1년 전 평창에서 메달을 독려하던 체육회장이 연맹 퇴출을 저렇게 쉽게 말할 수 있습니까? 빙상연맹에서 김연아도 나왔고, 이상화도 나왔어요. 대통령이 직접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혁신을 말하고 있는데, 체육회가 내놓은 혁신 대책이 결국 연맹 해체인가요? 선수와 연맹을 담보 삼아 빠져나가려는 꼼수 아닌가요?"
이날 젊은빙상인연대는 기자회견을 통해 '대한체육회 이기흥 회장을 비롯한 수뇌부의 총사퇴를 요구'했습니다. '이 회장과 대한체육회는 빙상연맹 해체라는 꼬리 자르기로 사태를 무마하려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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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평창올림픽 현장에서 자원봉사자에 대한 갑질 논란으로 한바탕 난리가 났었지요. 사실 자원봉사자에게 '머리를 쓰라'는 말은 회장님이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그래도 비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회장님과 절친한 인사의 실수였고, 결국 '인사가 만사'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가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노력하겠습니다" "개선하겠습니다"라는 답변을 반복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부끄러움은 왜 우리의 몫이었을까요. 곰 사냥, 골프장 로비 의혹, 불교계 인사 난맥상, 선수촌 내 음주 등 의원님들의 '버럭질'이 이어질 때마다 정말 낯뜨거웠습니다.
회장님의 지난 임기 2년간 대한민국 체육은 무엇이 달라졌나요? 잘 나가던 엘리트 스포츠는 사기가 바닥입니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인 생활체육 활성화도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체육회 통합을 통해 꿈꾼 스포츠 세상은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난해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에서 무려 24년만에 일본에 2위를 내줬을 때 대한체육회 스스로 "성적이 전부가 아니다" "세상이 바뀌었다. 메달이 전부가 아니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괜찮은 건 국민이지 체육회는 아닙니다. 시험을 망친 아이가 '스스로 괜찮다' 합리화하는 것같아 속이 쓰렸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올림픽 메달에 도전합니다. 우리가 바라마지않는 스포츠 선진국들은 올림피언, 메달리스트의 가치를 누구보다 높이 평가하고 인정합니다. '1등주의'가 잘못된 것이지, '1등'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1등주의'가 싫다고 '1등'을 없애야 할까요. '금메달 지상주의'가 잘못됐다고 '금메달'을 도외시해야 할까요? 잘못된 관행, 적폐를 없애는 일과, 올림피언과 금메달에 대한 존중은 구분돼야 합니다. 금메달을 향한 선수의 '피, 땀, 눈물'의 가치는 시공을 초월해 값진 것입니다. 밖에서 아무리 메달이 필요 없다고 해도, 적어도 대한체육회가 앵무새처럼 그 말을 따라해서는 안됩니다. 최고의 환경에서 최고의 선수들이 존중받는 가운데 최선을 다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는 것, 적어도 목표를 놓아버려서는 안됩니다. 연맹 퇴출을 쉽게 말하고, 메달도 필요 없다고 한다면, 대한체육회, KSOC의 정체성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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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체육회가 혁신위원회 내 조사위 구성을 발표한 바로 이튿날입니다. 정부의 가장 공신력 있는 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가 직접 대책을 내놨습니다. 정부가 이 문제를 직접 챙기겠다고 합니다. 대한체육회의 자정 노력, 혁신위원회의 조사를 신뢰하지 않는 눈치입니다. 문체부 관계자는 "체육회의 혁신위 구성에 대해 전혀 보고받은 바도, 미리 논의한 바도 없다"면서 "왜 중복되는 대책을 자꾸 내놓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정부도, 국민도, 국회도, 선수도 더 이상 대한체육회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좋은 생각을 가진 좋은 사람들이 대한체육회와 함께 일해야 할까를 고민합니다. 대한체육회는 고립돼 있습니다. 대한민국 체육이 이렇게 외로웠던 적이 있습니까. 대한민국 체육계를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든 것만으로도 이기흥 회장은 '유죄'입니다.
체육계는 곪아터져 신음하는데, 왜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지, 체육인들은 왜 침묵하는지, 체육계 어른들이 부끄러움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치욕의 시간을 보내고 계실 체육인들께도 한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서로를 향해 비난의 총구를 겨누는 모습이 가슴 아픕니다. 지난 수십 년간 공들여 쌓아올린 스포츠 '스카이캐슬'은 지금 '파국'을 맞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아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합니다. 10년 전에도 보았던 인권 대책, 위원회, 신고센터만 늘어갑니다. '우리들의 영웅' 심석희가 고통 속에 용기를 낸 이유, 그녀가 바란 세상이 결국 이것이었을까요? 그녀가 원한 것이 자신이 평생을 바친 얼음판, 대한민국 엘리트 체육의 몰락이었을까요?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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