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비운의 복서 박인규의 뜨거웠던 링

최재성 기자

기사입력 2018-09-04 17:06

<조영섭의 복싱 히스토리> 비운의 복서 박인규의 뜨거웠던 링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잘한 추억의 낙엽들이 쌓이고, 같은 일에 매달려 세월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인생의 가을을 맞은 듯하다. 지나간 흔적들이 체육관에 걸려 있는 원색 사진처럼 머릿속에 매달려 시공을 초월해서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그 흘러간 세월 속에 가난한 보릿고개 시절 국민들과 애환을 함께했던 복싱이라는 종목이 근자에 이르러 좌표를 잃고 표류하는 듯해 비통함을 느낀다. 특히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남자 복싱은 단 한 개의 메달도 획득하지 못하고 전원 탈락한 비보는 충격을 넘어 대형참사라는 황망한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사실 과거 각종 국제대회에서 양궁과 복싱만큼은 한국과 한국이 아닌 나라와의 대결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강세를 보였던 종목이었기에 진한 아쉬움과 함께 숨길 수 없는 허탈한 심정 속에 이번 주 복싱 히스토리를 시작해 본다.

오늘의 주인공은 70년대 황금의 체급이라 불린 아마복싱 밴텀급에서 간판스타 황철순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박인규라는 복서다. 박인규는 서울 남산공전(현 리라아트고) 동기이자 74년과 78년 아시안게임에서 각각 금과 은을 획득한 황철순만큼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한 복서였지만, 70년대 중반 국내 밴텀급을 평정하며 국제무대에서 국가대표 박찬희, 유종만, 김태호, 박태식 등과 함께 간판 복서로 입지를 구축했던 복서다. 박인규는 56년 전남 화순 출신으로 72년 '복싱사관학교'인 남산공전에 입학하면서 남영동에 있는 동신체육관에서 운동을 시작한다. 비슷한 시기에 대구에서 올라와 한영고에 입학한 박찬희가 원효로에 정착함과 동시에 동신체육관에 입관하면서 둘은 조선시대 오성과 한음처럼 운명적인 인연을 맺는다. 비슷한 체급의 천재 복서 박찬희와의 만남은 박인규의 복싱 인생에 굵은 획을 긋는 획기적인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기량이 급상승한다. 당시 동신체육관에는 당대 최고의 프로복서인 홍수환, 염동균, 고생근, 김학영 등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며칠 전 염동균은 필자와의 통화에서 "박인규는 정말 뛰어난 기량을 지닌 보기 드문 복서"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수준 높은 복싱을 구사했다.


◇75년 킹스컵 국가대표 시절의 박인규. <사진제공=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그해 서울 신인대회에서 우승하고, 이듬해인 73년 대통령배 대회에 서울 대표로 출전, 플라이급 우승과 함께 대회 최우수상을 받으며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아시아선수권 국가대표 선발전에 플라이급에 출전하는데 여기서 최대 이변이 일어난다. 천흥배, 김수원, 임병진 등 국가대표들을 꺾은 동아대 이형신이 무명의 신출귀몰한 하경주(한일체)에게 1회 3차례 다운을 당하고 RSC로 패한 것이다. 여기서 잠깐 '괴짜 복서' 하경주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54년 충북 천원 출신인 그는 75년 프로에 데뷔하여 24전 5승 5무 14패(10연패 포함)를 기록했는데 그의 지저분한 전적 속에는 전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김철호와 맞대결하여 한 차례 다운을 곁들이며 무승부한 경기를 비롯해서 국가대표 출신의 국내 2체급 챔피언 문명안을 판정으로 잡은 경기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전 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김성준과는 무승부를, 김철호에게는 판정승을 거둔 김영환(필승체)이라는 국내 챔피언을 2회 KO로 마무리한 경기는 경악을 금치 못할 대이변이었다. 그것도 부족해 일본에 원정 가서는 지독한 텃세를 극복하고 5승 1패의 다카스키 겐조라는 유망주를 일방적으로 난타해 승리를 거두는 등 종잡을 수 없는 선수였다. 박인규는 이 하경주를 맞이하여 일방적으로 난타, 2회 RSC승을 거둔다. 하경주의 마법은 거기까지였다. 결승에서 박인규는 70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인 김충배(명지대)와 대접전을 펼친 끝에 고배를 마신다. 졸업반이던 74년 제3회 아시아 아마복싱 주니어선발전에 밴텀급으로 출전한 그는 후에 킹스컵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최충일을 꺾었던 거함 박남철(이리 남성고)에게 압도적인 기량으로 2회 RSC승을 거두며 최우수복서에 선정된다. 이때부터 박인규 부친은 모든 것을 팽개치고 아들의 전폭적인 후원자로 전면에 등장한다. 그 무렵 유명했던 최충일, 김창석, 황철순, 김광민 부친과 함께 '바짓바람 5인방' 중 한 명이 박인규 부친이었던 것이다. 탄력을 받은 박인규는 75년 킹스컵 국가대표 선발전 밴텀급에서 최고의 복서인 김창석, 황철순, 임병진, 이형신 등과 진검승부를 겨루며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특히, 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밴텀급 국가대표인 김창석을 KO시키며 세대교체를 이룬 장면은 그의 복싱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 그는 전형적인 아웃복서로 호랑나비처럼 훨훨 날다가 상대가 들어오면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는 것처럼 강한 위력을 뿜어내는 타격 매커니즘은 발군이었다. 당시 모 기자는 그에게 '작은 알리'라는 닉네임을 선물하기도 했다. 국내를 평정한 박인규는 당시 권위 있는 국제대회 중 하나인 킹스컵대회에서 결승에 진출하는 등 그의 복싱이 국제무대에서도 통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75년 8월 일본에서 벌어진 아시아선수권대회에 황철순과 임병진을 꺾고 국가대표로 출전한 박인규는 뜻하지 않은 사고로 복서로서 치명상을 입으며 그의 복싱 인생에 먹구름이 몰려온다. 당시 스포츠신문 1면에 나올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당시 플라이급 국가대표였던 강희용과 그에게 패하면서 2군으로 입촌한 박찬희가 서로 호칭 문제로 트러블이 발생하자 박찬희와 동신체육관에서 동문수학한 박인규가 박찬희 편을 들며 강희용에게 훈계를 하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일어났고, 이때 박인규는 뜻하지 않게 왼손에 치명적인 부상을 한다. 이 사건으로 박인규는 퇴촌했고, 이후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강력한 파괴력이 사라지며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는다. 불의의 사고로 박인규가 빠진 대표팀 자리는 결정전을 통해 황철순을 꺾은 임병진이 차지하면서 일단락된다. 박인규는 그해 11월 몬트리올올림픽 1차 선발전에서 숙적 황철순에게 패하자 전열을 정비, 2차 선발전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박인규는 76년 최종선발 결승에서 숙적 황철순과 또다시 맞대결을 벌였지만 분패하자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은퇴를 선언한다. 이후 황철순은 76년 몬트리올, 78년 아시안게임, 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 국가대표로 발탁되며 박인규의 빈자리를 채운다.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듯이 둘은 필생의 라이벌이었다. 박인규의 남산공전 재학 시절 절친인 유종익 씨의 회고에 의하면 두 선수가 링에 오르기 전 신경전을 벌이다 붕대만 감은 채 맨손으로 치열한 타격전을 벌여 관중들에게 화끈한 서비스를 제공했던 일화는 둘의 관계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후에 황철순은 필자에게 "나도 빨랐지만 인규는 더 빨랐다. 그에게 연타를 성공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출중한 기량을 지니고도 기회를 잡지 못해 링을 떠나야만 했던 '비운의 복서' 박인규(가운데)가 유종익(왼쪽), 조성호 등 복싱인들과 포즈를 취했다. <사진제공=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박인규는 그해 10월 이안사노를 매니저로 전격 프로에 데뷔하여 박춘하를 꺾고 국내 챔피언에 등극, 10연승(1KO승)을 올리는 등 월등한 기량으로 한 발짝씩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나간다. 그리고 78년 6월 11전 때 일본으로 원정경기를 떠난다. 같은 밴텀급 국가대표 출신에 같은 나이, 같은 10전 전승(7KO승)을 기록한 일본의 신성 무라다 에이지로였다. 무라다는 일본의 전설적인 밴텀급의 영웅 파이팅 하라다 이후 맥이 끊긴 밴텀급의 기대주였다. 도쿄 고라쿠엔에서 벌어진 이 경기는 전파를 타고 전국에 중계됐을 만큼 관심을 끌었다. 둘은 한 차례씩 다운을 주고받는 치열한 접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했는데 일본 언론도 돈이 아깝지 않은 세계 타이틀전에 버금가는 명승부라고 찬사를 늘어놨다. 무라다는 경기 후 자신이 패한 경기라고 인정을 했을 정도로 박인규는 우세한 경기를 펼쳤다. 무라다는 이 경기 이후 김영식을 꺾고 동양챔피언에 올라 문명안, 이종수, 오용환, 박종철, 오동렬 등 국내 간판급 복서들을 연속 KO승의 제물로 삼으며 동양타이틀 12차 방어에 성공하는 등 상승세를 탄다. 이후 WBA, WBC 양대 리그 세계랭킹 1위에 올라 WBC 밴텀급 챔피언 루페 핀토르(멕시코), WBA 밴텀급 챔피언 제프 챈드러(미국)의 타이틀전에 지명도전자로 나서 무승부를 기록하는 등 기량을 맘껏 발휘했지만, 박인규는 카르도나, 사라테 등과의 세계 타이틀전이 구두로 오갔지만, 진척이 없자 운동에 대한 열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그해 12월 오동렬과의 경기를 끝으로 23세의 젊은 나이에 사실상 은퇴를 한다. 비슷한 기량을 지닌 두 복서가 프로모터의 능력에 의해 엇갈린 운명으로 갈라진 것이다. 그는 짧지만 강렬한 임팩트를 남기고 링을 떠나 후회는 없다고 한다. 캐롤 터킹턴의 어록이 생각난다. '절대 후회하지 마라.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다'.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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