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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만리장성 뒤흔든 정영식,모두가 안된다던 '탁구바보'의 반전

전영지 기자

기사입력 2016-08-16 15:56


15일 오후(현지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리오센트로 파빌리온 3경기장에서 열린 탁구 남자 단체전 준결승전 한국과 중국의 경기에서 정영식이 장지커를 상대로 3세트 승리를 따내며 환호하고 있다./2016.08.15/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N

15일 오후(현지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리오센트로 파빌리온 3경기장에서 열린 탁구 남자 단체전 준결승전 한국과 중국의 경기에서 정영식이 공격을 성공한 후 환호하고 있다./2016.08.15/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15일 오후(현지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리오센트로 파빌리온 3경기장에서 열린 탁구 남자 단체전 준결승전 한국과 중국의 경기에서 정영식이 장지커를 상대로 3세트 승리를 따내며 환호하고 있다./2016.08.15/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N

"이제 '국내용'이라는 오명은 멀리 버린 거죠?"

정영식(24·미래에셋대우)이 14일(한국시각) 스웨덴과의 리우올림픽 남자탁구 단체전 8강에서 단식, 복식을 모두 잡아내며 4강행을 이끌던 날, 안재형 남자대표팀 코치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9일 단식 16강에서 '세계1위' 마롱을 상대로 한 풀세트 명승부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6일 오전 이어진 중국과의 4강전, 1게임에서 정영식은 장지커와 마주했다. 장지커가 누구인가. 2012년 런던올림픽 금메달리스트, 2011, 2013년 세계선수권 남자단식을 2연패한 중국 탁구의 슈퍼스타다. 마롱 못지않은 지구대표 스타다. 리우올림픽에선 마롱에 이어 단식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정영식은 기죽지 않았다. 대담하게 맞섰다. 1세트를 15-13으로 먼저 따냈다. 2세트를 듀스 접전끝에 11-13으로 내줬지만 대등한 경기였다. 3세트를 11-9로 이기며 승기를 잡았다. 4세트 8-5까지 앞섰지만 이후 역전을 허용했다. 만약 이 고비를 넘겼다면 이후 경기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결국 세트스코어 2대3으로 패했지만 정영식은 세계 최강의 백드라이브를 장착한 장지커와의 백드라이브 싸움에서 밀리지 않았다. 특유의 갈라치는, 영리한 코스 공략, 서브로 '탁구의 신' 장지커를 농락했다.

낙승을 예상했던 류궈량 중국 대표팀 감독의 벤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난공불락' '천하무적' 중국의 벤치는 늘 자신만만하다. 12년간 중국대표팀을 이끌어온 올림픽 챔피언 출신 류궈량 감독은 좀체 흔들리는 법이 없다. 간간이 박수를 몇차례 칠 뿐 무표정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날 류 감독의 표정에선 2004년 아테네올림픽 유승민-왕하오의 결승 맞대결 이후 실로 오랜만에 당혹감이 읽혔다. 급기야 타임아웃에서 시간을 끌다 심판에게 주의를 받기까지 했다. 2000년대 중국 벤치에서 만나기 드문 명장면을 이끌어낸 건 '탁구바보' 정영식이었다. '국내용'이라는 혹평속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탁구를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던 청년이 첫 올림픽 무대에서 자신의 모든 꿈을 보란듯이 펼쳐보였다.

정영식은 '테크니션' 김택수 대우증권 감독의 애제자이자 자타공인 국내 톱랭커(세계랭킹 14위)다. 2011년 미래에셋대우 유니폼을 입은 이후 명실상부 국내 실업 최강을 이어왔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웬만해선 1위를 놓치지 않는 '절대 에이스'다. 머리가 영특하다. 리시브가 좋고 연결력이 뛰어나다. 허투루 버리는 공이 없다. 질긴 플레이에 상대들이 나자빠진다.

그러나 국내 랭킹 1위 정영식에 대해 물을 때면 많은 탁구 전문가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공으로는 세계 무대에 통하기 힘들다"고들 했다. '정영식=국내용'이라는 꼬리표도 늘 따라붙었다. 천재형 선수 김민석, 왼손 에이스 서현덕 등 또래들에 비해 재능이 부족하다고들 했다.

정영식은 "선생님들이 재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어쩔 수 없지'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게 제일 힘들었다"며 웃었다. "비판을 속상해하기보다 먼저 인정하기로 했다. 대신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똑같이, 하던 대로 신경쓰지 말고 더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결과적으로 그 때문에 다른 선수들보다 노력을 더하게 됐다." 스승 김택수 감독은 끊임없이 애제자를 독려했다. 정영식은 "김 감독님은 내 멘토다. 늘 '주변의 평가는 신경쓸 것 없다. 너는 할 수 있다. 나는 너를 믿는다. 결국엔 네가 제일 잘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해주셨다"며 고개숙였다.

정영식은 지독한 노력파, 지독한 연습벌레다. '집착'이라고 할 만큼 탁구를 사랑하는 선수다. 탁구 신동들이 집결한 '탁구명문' 내동중-중원고를 거치며, 탁구는 '선택'이 아닌 '운명'이 됐다. "선수들끼리 경쟁도 심하고. 연습량도 많고, 이때부터 일주일, 하루 24시간 내내 탁구 생각, 탁구 얘기만 했다. 밥 먹을 때도, 잘 때도 탁구생각을 했다." 머릿속엔 수만가지 작전, 수만가지 시스템이 생겨났다.


첫 올림픽에서 목표 삼은 건 모두가 안된다던 '금메달'이었다. '금메달'을 따려면 중국을 넘어야 한다. 정영식은 한달 내내 마롱의 경기영상을 보며 '이기는 법'을 연구했다. 마롱을 넘는다면 누구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고등학교 선배이자 동료이자 라이벌인 이상수와 끊임없이 토론하고 땀흘렸다. 복식에서 한몸처럼 움직일 때까지 훈련했다. 경기가 끝나고 나면 이들은 쉴새없이 경기 내용을 복기했다.

올림픽 무대에서 정영식의 탁구는 거짓말처럼 폭풍 성장했다. 세계 톱 랭커를 상대로 주눅들지 않았다. 80%를 보여줘도 성공이라던 무대에서 정영식은 200%를 보여줬다. 장기인 백드라이브는 견고했다. 연결력에 치중하는 '약한' 탁구로 폄하됐던 그의 탁구가 강해졌다. 거침없는 선제공격이 작렬했다. 마롱과 장지커를 좌우 코너로 몰아대며 끝내 공격에 성공한 후 뜨겁게 포효하는 정영식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정영식은 리우행을 앞두고 아테네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선배 유승민(삼성생명 코치)을 떠올렸었다. "승민이형은 큰 무대에서 유리한 탁구를 가장 잘 아는 선수다. 큰 대회는 기술보다 심리다. 상대 심리를 흔들고, 자신이 유리해지는 탁구를 승민이 형에게 배우고 싶다"고 했다. "올림픽 무대는 아무도 모른다. 승민이형이 금메달을 딸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주)세혁이형도 세계랭킹 60위일 때 중국선수 6명이 나간 파리세계선수권에서 준우승했다. 올림픽 때 우리의 컨디션이 최고로 좋다면, 그리고 상대의 실수를 집요하게 파고든다면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중국에 0대3 패한 남자탁구 대표팀은 17일 독일과의 3~4위전에서 만난다. '탁구바보' 정영식의 패기 넘치는 탁구는 계속된다. 애제자의 성장에 스승 김택수 감독은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 선수들은 정말 잘돼야 합니다. 영식이를 보면 가슴이 뜁니다. 앞으로 뭘 보여줄지 기대가 됩니다."
리우데자네이루=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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