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세에 세상 떠난 노진규의 슬픈 이별, 못다 핀 꽃 한송이

김성원 기자

기사입력 2016-04-04 18:22



2011년 3월 한국 쇼트트랙은 새로운 얼굴의 등장으로 행복했다.

김기훈→채지훈→김동성→안현수로 이어지는 남자 쇼트트랙 에이스 계보을 이을 새로운 '걸물'이 탄생했다. '10대의 반란', 주인공은 당시 19세의 노진규였다. 경기고를 졸업한 그는 한국체대에 갓 입학한 새내기였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2010년 밴쿠버동계올림픽 2관왕 이정수와 남자 계주 은메달리스트 곽윤기가 '짬짜미 파문'에 휘말려 6개월 동안 선수 생활을 정지당하며 틈새가 생겼다.

노진규가 그 공백을 완벽하게 메웠다. 서막이 2011년 초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이었다. 그는 2관왕에 오르며 차세대 에이스로 떠올랐다. 질주는 거침이 없었다. 3월 세계 무대를 정복하는 대이변을 연출했다. 영국 셰필드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000m와 1500m에 이어 3000m 슈퍼파이널에서 정상에 등극하며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미완의 대기에서 쇼트트랙의 얼굴로 우뚝섰고,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의 전망도 한층 밝았다. 노진규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환희는 오래가지 못했다. 운명의 장난은 처절할 정도로 가혹했다. 소치올림픽을 앞두고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왼쪽 어깨 통증이 가시지 않아 2013년 9월 월드컵 시리즈 1차 대회 후 조직검사를 받았고, 종양이 발견됐다. 그러나 소치올림픽을 위해 멈출 수 없었다. 통증을 참고 또 참으며, 수술을 올림픽 이후로 미뤘다.

하지만 2014년 1월 훈련 도중 팔꿈치 골절로 올림픽 출전이 무산됐다. 팔꿈치 수술과 함께 어깨 치료도 시작했다. 그러나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거하려던 종양은 애초 알고 있었던 것과 달리 악성인 골육종이었다. 노진규는 왼쪽 견갑골을 들어내는 큰 수술을 받은 뒤 항암 치료를 받았다.


암투병 중인 쇼트트랙 대표팀 노진규의 메시지
허상욱 기자 wook@sportschosun.com/2014.02.11/
'왼손잡이'인 그는 대수술로 왼손을 쓸 수 없었다. 소치올림픽 기간 오른손으로 편지를 쓰며 대표팀 동료들의 선전을 응원했다. '마지막까지 화이팅하자!' 몸은 병상에 있었지만, 마음은 동료들과 함께 새하얀 얼음판을 지치고 있었다.

소치올림픽이 막을 내린 직후인 3월, 그는 스포츠조선과 한국 코카콜라가 함께하는 코카콜라체육대상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대리 수상한 노진규의 아버지 노일환씨의 목소리는 떨렸다. "진규가 주위의 도움 덕분에 씩씩하게 항암 치료를 받고 있다. 이 상이 진규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그의 꿈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이었다. 병마와 싸워 이긴 후 얼음판에 복귀할 것이라는 믿음도 컸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올림픽 금메달의 꽃은 끝내 피지 못했다. 지난해 1월 병세가 회복돼 재활을 시작했지만 골육종이 재발해 다시 투병했고,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과 슬픈 이별을 했다.


스피드스케이팅 대표선수이자 노진규의 누나인 노선영(27·강원도청)은 4일 노진규의 SNS 계정을 통해 '진규가 4월 3일 오후 8시 좋은 곳으로 떠났습니다. 진규가 좋은 곳에 가도록 기도해주세요'라며 동생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아홉 살 때 누나를 따라 스케이트와 처음 인연을 맺은 노진규는 차가운 빙판위에 뜨거운 꿈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그가 걸어온 길이 특별했기에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깊은 슬픔에 잠겼다.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쇼트트랙 대표로 동고동락하다 소치올림픽 후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 전향한 박승희(24·스포츠토토)는 SNS 계정을 통해 '방금 널 보내고 왔어. 너랑은 좋은 기억 뿐이다. 다음 생에도 우리 꼭 친구로 만나자'라는 글을 남겼다

러시아로 귀화한 쇼트트랙 스타 안현수(31)는 한국체대 후배의 죽음에 '진규야 함께 했음을 영원히 기억할게. 스케이트에 대한 너의 열정 잊지 못할거야. 빙판 위에 너는 정말 행복해 보였고 늘 최고였어. 고마웠고 많이 그리울 거야'라며 추모했다. 그는 노진규, 샤를 아믈랭(캐나다)과 함께 시상식에서 찍은 사진도 올렸다.

노진규와 국제대회에서 경쟁했던 외국 선수들도 SNS 계정을 통해 애통함을 전했다. 캐나다의 간판스타 샤를 아믈랭(32)은 '오늘은 슬픈 날이다. 나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노진규가 세상을 떠났다. 정말 안타깝다. 그는 2011년 세계챔피언이었다. 가족에게 조의를 표한다'며 슬퍼했다. 영국 대표팀의 잭 웰본(25)도 페이스북 계정에 노진규와 경기하는 사진을 올리며 '노진규, 당신의 최고의 스케이터였다'고 애도했다. 노진규의 빈소는 서울 원자력병원 장례식장 2층 VIP실에 마련됐고, 발인은 5일 오전 7시 열린다.

그의 생애는 길지 않았다. 하지만 빙판에 뿌려진 노진규의 향기는 쇼트트랙 역사 속에 영원히 남았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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