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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팔방미인을 원한다. 그러나 하나만 잘하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멀티 플레이어'라는 단어는 장밋빛 꿈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라운드에서 흘린 땀을 닦고 배움의 환희 속에 성장하는 선수들은 그래서 더욱 위대하다. 지난 2년간 스포츠조선이 발굴하고 소개한 '공부하는 선수, 운동하는 학생'의 대표주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5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대한민국 스포츠 백년지대계-공부하는 선수 운동하는 학생' 포럼에 나선 '학생선수'들은 자신이 걸어온 길과 후배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생각을 아낌없이 풀어놓았다.
이정호는 2013년 엘리트 야구선수 최초의 서울대 입성(체육교육학과)으로 화제를 모았다. "운동선수라서 무식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는 절대 안된다. 야구 만큼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 어머니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공부에 70%, 야구에 30%를 배분한 이른바 '7대3 황금비율'로 이뤄낸 쾌거다. 덕수고 3학년이던 2012년에는 고교야구 주말리그 전반기 수훈상, 청룡기 고교야구대회 타격 부문 3위(0.500) 등 실력도 빠지지 않는 기대주다. 이정호는 서울대 입학 뒤에도 야구를 계속하기 위해 넘어야 하는 3.5학점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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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수영선수 양준혁(20)은 '수영 양신'으로 불린다. 프로야구 스타 양준혁과 동명이인이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꿈을 향한 피나는 노력도 '양신'을 능가한다. 선수 생활에 한창이던 고3 시절 진천선수촌에서 2시간 반 쪽잠을 자며, 수험생활에 매달렸다. '악바리 근성'으로 평생의 꿈이던 서울대 입학을 이뤄냈다. 실업팀 지원금을 마다하고 책을 놓지 않는 그의 열정에 서울대 체육교육학과에서는 동문 장학금을 지급할 정도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는 '마린보이' 박태환(인천시청)과 함께 남자 계영 단체전 400m, 800m에서 한국신기록으로 동메달을 따내면서 진정한 '멀티 플레이어'로 자리매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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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간 녹색 그라운드를 달려온 베테랑 골키퍼 김병지(43·전남)에겐 축구가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두 번의 월드컵 출전과 K-리그 최다-최고령 출전 기록(44세 7개월 14일·679경기)이라는 눈부신 타이틀의 소유자다. 그러나 삶의 일부일 뿐이다. 김병지는 시즌 뒤엔 자격증, 독서에 몰입하는 '공부 마니아'로 변신한다. 산전수전 다 겪은 레전드지만 여전히 세상 앞에 부족한 게 많다는 겸손한 선수다. 철저한 자기 관리 속에 '세상을 알아야 한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법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배우기 위해 발걸음을 마다하지 않는 '패밀리맨'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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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바람이 무섭다'는 말은 '빙상 레전드' 이규혁(36)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을 끝으로 현역생활을 마치자마자 '만학'의 길에 접어들었다. 은퇴 직후 주저없이 시작한 공부는 이제 한국 빙상에 기여하기 위해 거쳐가야 할 새로운 도전이 됐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가 두려울 법도 하지만,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온 그에게는 '즐거움'이자 '자극'일 뿐이다. 지난 여름 자신의 올림픽 6회 도전사를 주제로 고려대 체육교육대학원 석사논문을 마무리 한 이규혁은 박사과정에도 도전할 생각이다. 체육인재육성재단에서 글로벌 인재 전문과정을 수강중이다. 이규혁은 "공부의 길도 먼저 가는 선배가 되겠다. 누군가의 말만 듣고 움직이지 않는, 스마트한 지도자가 되고 싶다"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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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리듬체조 팀경기 은메달리스트 이나경(16·세종고)은 '태릉 책벌레'다. 바쁜 훈련일정 속에 역사책, 추리소설을 즐겨 읽고, 논어를 노트에 빼곡히 옮겨쓰는 자신만의 공부법을 깨우쳤다. 휴대폰보다 책이 좋다고 할 정도니 '책벌레'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똘망똘망한 학생선수 이나경에겐 '예체능은 왜 공부를 안하고 못한다고 생각하는지'가 의문이었다. 궁금함이 생길 때마다 교무실을 찾아가는 적극적인 '노력파'이기도 하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림만으로도 하루가 부족한 10대 소녀지만, 이미 은퇴 뒤의 진로까지 고민할 정도로 '알찬 소녀'다. '선수=체대 입학'이라는 공식에도 당차게 의문을 제기했다. '역사학도'의 꿈을 꾸고 있다.
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