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소년이 한국 테니스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주인공은 주니어 세계 랭킹 41위인 정 현(삼일공고)이다. 그는 7일(한국시각) 영국 윔블던의 올잉글랜드 클럽에서 벌어진 윔블던 주니어 대회 남자 단식 결승전에서 잔루이지 퀸치(이탈리아·주니어 7위)에게 0대2(5-7, 6<2>-7)로 분패했다.
정 현은 어렸을 때 손쉽게 테니스를 접할 수 있었다. 아버지인 정석진씨가 삼일공고 감독이었다. 세 살 터울의 형 정 홍(20·건국대)이 먼저 테니스 선수로 활동했다. 정 현은 수원 영화초 1학년 때 형을 따라 테니스 라켓을 잡았다. 어머니 김영미씨는 "형이 운동을 하고 있어 동생은 테니스를 시킬 마음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동생이 형을 따라 운동을 시작하자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테니스를 계속 시켰다"고 말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 현의 피는 남달랐다. 하루가 다르게 기량이 향상됐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한 살 많은 형들을 제치고 부동의 국내 초등랭킹 1위를 달렸다. 6학년 때는 세계 주니어 테니스계에 자신의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2008년 미국 오렌지보울 국제주니어대회 12세부 단식과 에디허국제주니어대회 12세부 단식 우승을 차지했다. 정 현은 순식간에 한국 테니스를 살릴 희망으로 떠올랐다. '한국 테니스 간판스타' 이형택(이형택테니스아카데미재단 이사장) 이후 끊긴 한국 남자 테니스의 숨통을 틔어줄 별로 평가받았다. 정 현은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2011년 국내 선수 최초로 오렌지보울 16세부 우승을 일궜다. 국내 선수가 오렌지보울 16세부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처음이었다. 12세부에서는 1998년 최동휘(현대해상), 2001년 김청의(안성시청), 2008년 정 현(수원북중), 2009년 홍성찬(우천중) 등 테니스 유망주들이 우승을 따낸 바 있었다. 여자 14세부에선 이소라(원주여고)가 2008년 우승을 차지했었다.
정 현은 '될성 부른 떡잎'이었다. 7살 때 판정받은 약시를 극복했다. 안경에 평면렌즈를 넣어야 해 스포츠고글도 착용하지 못했다. 그런데 움직이는 공에 반응하다 보니 오히려 동체시력(움직이는 물체를 보는 시력)이 좋아졌다. 특히 정 현은 성격도 스스로 밝게 만들었다. 유머책을 읽으면서 긍정적인 성격으로 변화시켰다. 윤용일 국가대표 감독은 "현이는 대표팀 내 분위기 메이커"라고 칭찬했다.
정 현의 폭풍 성장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해 아버지가 지휘봉을 잡고 있는 삼일공고로 진학한 뒤 기량이 더 늘었다. 부친 정 감독은 고개를 숙였다. "다른 선수들을 챙기느라 오히려 아들에게 관심을 덜 쏟았다. 혼자 잘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정 현의 윔블던 준우승 쾌거는 꽉 막혀 있던 한국 테니스계의 청량음료가 되고 있다. 정 현은 8일 금의환향 이후 "현지에선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한국에 와서 많은 취재진을 보니 이제 실감이 난다"고 웃었다. 더불어 "윔블던처럼 많은 관중들 앞에서 처음 경기를 해봤다. 긴장이 됐지만 점점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당당한 포부도 밝혔다. 정 현은 "이형택 원장님을 뛰어넘어 시니어 대회에서도 트로피를 올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 현의 성장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무궁무진하다. 윤용일 대표팀 감독은 "잔디 코트에서 처음 경기를 해본 터라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적응력이 빨랐다. 나도 놀랐다"며 뿌듯해했다. 또 "가깝게는 이형택의 기록을 깨고, 주니어 톱10 안에 진입할 수 있는 기술을 가졌다. 스트로크는 톱클래스 수준이다. 네트플레이와 서브를 보완한다면 대형 선수가 될 수 있다"고 극찬했다. 윤 감독은 정 현의 강한 정신력도 높이샀다. "선수의 투지와 집중력이 톱클래스다. 어린 선수들이 멘탈이 부족한데 현이는 놀라울 따름"이라고 했다.
인천공항=김진회기자 manu35@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