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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국내 간판 자동차경주대회 2012 헬로모바일 슈퍼레이스 슈퍼6000 클래스(6200cc, 스톡카) 2년연속 챔프에 오른 CJ레이싱팀 김의수의 카레이서 인생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를 탄 듯하다.
바닥에서 최고의 카레이서에 오르기까지 눈물과 웃음은 반복됐다.
하지만 경제위기로 랠리 프로젝트는 물거품이 돼버렸다.
다시 도전한 일본 무대에서 재기하기에도 쉽지 않았다. 그야말로 바닥 생활을 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런 가운데 호주와 일본의 카레이싱 노하우를 높이 산 국내 레이싱팀에서 스카웃이 들어왔다.
이렇게 프로 드라이버 20년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김의수는 뜻하지 않은 기회와 좌절의 연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광의 순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는 "현대자동차에서 랠리드라이버를 뽑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가해 단 1명을 뽑는 테스트에 당당히 합격했다"며 "하지만 호주에서 훈련을 하며 1류 선수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갑자기 IMF가 터져 2년간 무산되게 됐고, 후에는 이를 주관했던 사장님이 은퇴하며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고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이어 그는 "결국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레이싱을 계속하기 위해 일본으로 넘어갔다. 일본에서 아는 사람 없이 홀로 돈 한푼 없는 정말 거지 같은 생활을 했다"며 "그러다 인디고 팀으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돌아와 프로팀에서 뛰면서 의도치 않게 에이스가 됐다"고 털어놨다.
챔프에 오른 지금 그는 "팀원들의 기대와 성적에 대한 압박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았지만 꿈이 있고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2012 슈퍼6000 클래스 챔피언 김의수 일문일답-
Q. 원래 카레이싱에 관심이 있었나? 모터스포츠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나.
20살 때 우연히 오프로드 경기 팜플렛을 보고 경기를 보러갔다. 경기를 보고 너무 재밌다고 생각했고 내가 직접 경기를 하고싶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그래서 당시에 살고있던 울산에 레이싱팀이 있는지 알아봤고 무작정 경기장을 찾아갔다. 경기장에는 현재도 레이싱에 몸담고 있는 분들이 있었다. 당시 울산 용마라는 팀이었는데, 무작정 레이싱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처음 모터스포츠에 입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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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엔 우리나라 모터스포츠가 초창기였다. 지금에 비해 상황이 굉장히 열악했다. 차도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았고 지금처럼 매케닉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선수들이 직접 자신의 차량을 셋팅하고 용접, 부품 교체 등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했다. 데이터같은 것도 물론 없었다. 모든 것을 경험에 의해 터득했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 속에서 열정 하나만으로 버틴 것 같다. 레이싱에 대한 엄청난 열정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제대로된 트랙이 없어서 산 같은 곳에서 연습도 많이 했다.
Q. 20년 정도 레이서로 활동했는데 계속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열심히 경기에 임했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도전정신도 한 몫 한 것 같다. 그리고 모터스포츠가 비전이 있다고 생각했다.
Q. 레이싱을 시작하면서 목표가 무엇이었나?
스스로와 약속을 했다. 단순히 우승이 아닌 1인자가 되겠다고. 최고 클래스에서 챔피언이 되고 싶었고 10년 동안 최선을 다해보고 만약 이루지 못한다면 그만 두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딱 10년이 되던 해에 꿈을 이뤘다. 2002년 GT1 대회에서 챔피언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전성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Q. 슬럼프가 있었나? 어떻게 극복했는는지.
90년대 오프로드 경기를 할 당시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나서 현대자동차에서 랠리드라이버를 뽑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가해 단 1명을 뽑는 테스트에 당당히 합격했다. 호주에서 훈련을 하며 1류 선수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갑자기 IMF가 터져 2년간 무산되게 됐다. 그 후에는 이를 주관했던 사장님이 은퇴하며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 결국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레이싱을 계속하기 위해 일본으로 넘어갔다. 일본에서 아는 사람 없이 홀로 돈 한푼 없는 정말 거지 같은 생활을 했었다. 그러다 인디고 팀으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돌아와 프로팀에서 뛰면서 의도치 않게 에이스가 됐다. 팀원들의 기대와 성적에 대한 압박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았다. 그래도 꿈이 있고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다.
Q. 레이싱을 하면서 힘든 점은?
내 꿈이었던 챔피언을 한 뒤로 목표를 잃었었다. 사실 1위를 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려운것 같다. 주위 사람들에게 말은 못하지만 부담이 크다. 프로 생활보다 오히려 아마추어가 마음은 편한 것 같다. 챔피언 자리를 지키기위해 애쓰는 내 자신이 외톨이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런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배부른 소리라고 할까봐 주위에 털어놓기도 힘들다. 1위를 하면 당연한 것이고 2위를 하면 왜 그랬냐는 듯한 반응이 힘들다.
Q. 드라이버 생활을 하면서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 한명의 특정인물이 아니라 모터스포츠 업계에 함께 몸 담으며 지금까지 함께 해온 모든 사람인 것 같다. 다들 오래 전부터 함께하며 우리나라 모터스포츠의 발전을 위해 힘써온 사람들이다. 열정이 넘치는 이 사람들을 보며 서로 공동체 의식도 느끼고 의지가 된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있기때문에 '나는 정말 행복하게 경기를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사람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다. 그렇기때문에 언젠가는 내가 받은 것들을 돌려주고 싶다. 특히 CJ 슈퍼레이스의 김동빈 이사가 큰 노력을 했다.
Q. 레이싱을 하며 기억에 남는 일은?
내 꿈이었던 최고 클래스에서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날이다. 오래 전부터 꿈이었던 일을 해내고 기분이 묘했다. 울기도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그 날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Q. 후배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사실 어쩔 수 없이 나 때와 비교를 많이 하게 된다. 지금은 SNS가 발달해서 온라인 상의 소통이 발달했다. 그래서인지 현실에서의 소통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어찌보면 우리 때보다 열정이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때의 드라이버들은 모르는게 있으면 선배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맞기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배웠다. 그런데 요즘 선수들은 그런게 부족하다. 형식적인 인사와 겉치레 뿐, 진심어린 관계가 소원한 것 같다. 선후배간의 소통과 대화가 부족한데, 이러한 점들이 개선됐으면 좋겠다.
Q. 은퇴 후 혹은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레이싱 관련 기관을 설립하고싶다. 자동차, 항공, 해운 모든 것을 한 곳에서 배울 수 있는 종합적이고 전문적인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고 싶다. 학교 내에서 연구도 하고 공부도 하고 기업들과 협정을 맺어 실무도 경험할 수 있게 말이다. 그리고 수익을 내고 그 수익을 학생들에게 투자하는 학교로 만들고 싶다.
Q. 아직 미혼인데, 결혼 생각은 없는지?
예전에는 결혼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름대로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좋은 사람이 생기면 결혼도 하고싶다.
/지피코리아 정은지 기자 eunji@gpkorea.com, 사진=지피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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