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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주기' 경기를 펼친 행위 자체는 올림픽 정신 뿐만 아니라 세계배드민턴연맹(BWF) 규정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가담 정도에 따라 억울한 측면도 있겠지만 올림픽인 만큼 전원 실격 징계를 받아도 사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세계 배드민턴을 지휘하는 BWF가 도마에 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나
"솔직히 지도자 입장이라면 한국대표팀의 이번 파문에 대해 섣불리 비판하지 못할 것이다." 전직 국가대표 감독을 비롯한 국내 배드민턴계 지도자 상당수는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성서에 등장하는 가르침처럼 '죄없는 자 돌을 던지라'는 것이다. 한 감독은 "이번 사태를 보는 시각도 이중잣대가 적용되는 게 아닌가. 만약 '져주기'가 이렇게 크게 문제화되지 않았으면 로맨스이고, 그렇지 않았으니 불륜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흔히 국제대회에서 메달이 걸린 준결승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까다로운 상대를 피하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특히 조별예선에서 상위 토너먼트 진출이 확정된 상태라면 더욱 그렇다. "무서운 상대를 만날 게 뻔히 보이고,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정공법을 선택했다가 국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전략이 부족했다. 미련하다'는 소리만 더 듣겠느냐"는 게 이들이 항변이다. 연맹의 징계위에 회부될 만큼 너무 노골적으로 '전략'을 구사한 것은 미숙했지만 그런 '전략'을 비난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배드민턴계는 함정같은 경기방식을 만들어놓은 BWF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한다.
막을 수 있는 인재였다
대한배드민턴협회는 "이번같은 사태가 나올 것이란 예상이 진작부터 가능했는데도 BWF가 사전 예방대책에는 미흡한 게 많았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BWF은 이번 런던올림픽에서 새로운 경기방식을 도입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배드민턴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까지 5차례 올림픽을 거치는 동안 올림픽 본선 토너먼트제를 고수하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조별예선제를 실시했다. 조별예선제가 문제는 아니다. BWF가 경기일정을 짜는 과정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 것이다. 조별예선 이후 단판승부 토너먼트의 대진표를 미리 공개한 것이다. 8강(단식의 경우 16강)에 오르면 어떤 상대와 만날지 뻔히 알 수 있다. 조별예선 통과가 확정된 상태라면 피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기 좋은 구조였다. 축구 등 다른 종목도 이와 비슷한 방식이다. 하지만 BWF는 경기일정을 잘못 배치했다. 축구처럼 조별 최종전은 같은 시간 동시에 진행하면 조별순위 조작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배드민턴은 이번에 문제가 된 2경기의 경우 1시20분 간격으로 벌어졌다. 조별예선 경기 순서 편성도 미흡했다. 여자복식 조별예선에서는 팀당 3경기를 치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각 조마다 최강의 2개팀이 최종전에서 맞붙도록 편성됐다. 최종전 이전에 2연승으로 8강을 확정한 상태였으니 최종전에서 조작이 가능해진 것이다. 초반에 강팀끼리 붙여 한 번 승패를 가렸다면 최종전에 대충 임할 수 없게 된다. 8강 대진표 작성에서도 예방책은 있었다. 미리 조별 1, 2위의 일정을 짜놓을 게 아니라 조별예선이 끝난 뒤 추첨을 통해 토너먼트 대진을 다시 짜면 된다는 게 배드민턴협회의 제안이다.
조별예선제 왜 도입했나
배드민턴에서 조별예선제는 런던올림픽이 처음이다. 각종 오픈대회, 슈퍼시리즈에서도 토너먼트로 대회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종전 5차례 올림픽도 모두 토너먼트 방식(단식 64강, 복식 16강부터)으로 실시됐고, '져주기' 등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BWF가 올해 조별예선제를 도입한 취지는 좋았다. 세계 배드민턴계의 전력 평균화와 참여의 폭 확대를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번에 조별예선제가 도입되면서 남자단식 40명, 여자단식 46명이 각각 16개조로 나뉘었고 복식은 각각 16개팀이 4개조로 나뉘어 경기를 치렀다. 전체 출전선수 숫자는 종전보다 줄었지만 예선리그로 인해 선수 개인당 경기수가 많아졌다. 종전처럼 약체 선수의 경우 달랑 1경기를 치른 뒤 짐을 싸야하는 경우는 없다. 그동안 올림픽은 배드민턴 약소국에게는 들러리 무대나 다름없었다. 변방 국가들의 참여를 유발하고 올림픽이란 큰 무대에서 한 경기라도 더 치르면서 경험을 쌓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조별예선이 적합했다. 화합으로 함께 즐기는 올림픽의 취지와도 맞았다. 하지만 기술적인 실행과정에서 오류가 났다.
최만식 기자 cm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