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보고 울어버린 현정화의 '코리아' 이야기

전영지 기자

기사입력 2012-04-20 08:29


현정화 대한탁구협회 전무가 영화 코리아에서 자신의 역할을 맡은 하지원에게 탁구 기술을 지도하고 있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지난 16일 영화 '코리아'의 시사회 기자회견, 하지원 배두나 등 주연배우들이 무대에 올랐다. 있어야 할 현정화 대한탁구협회 전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영화 '코리아'는 남북탁구 단일팀이 1991년 지바세계선수권에서 '코리아'의 이름으로 정상에 섰던 그날의 환희와 눈물에 대한 기록이다. 기자회견이 끝나갈 무렵에야 '실존인물' 현 전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너무 울어서… 엉망이 된 화장을 고치느라…." 2년을 공들여온 영화를 처음으로 마주했다. "영화 내내 펑펑 울었다"고 했다. "그날의 기억이 그대로 오버랩되는데,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더라"고 했다. .

현정화의 현정화에 의한 현정화를 위한 영화

영화 '코리아'는 현정화의, 현정화에 의한, 현정화를 위한 영화다. 2년 전 '코리아' 영화제작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반드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캐스팅 단계부터 컴퓨터 그래픽(CG) 완성 단계까지 시작과 끝을 함께했다. 자타공인, 그녀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실현불가능했을 프로젝트다.

서울집과 안동 촬영장을 오가며 라켓 한번 잡아본 일 없는 배우들에게 몸소 탁구를 가르쳤다. '왼손 전형' 북한 에이스 리분희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배두나에게 '왼손 탁구'를, 북한 유순복 역할을 맡은 '왼손잡이' 한예리에게 '오른손 탁구'를 가르쳤다. 절친 유남규 감독, 국가대표 출신 김분식 대한탁구협회 홍보과장을 비롯 한국마사회, 대한항공 제자 선수들이 선생님 겸 파트너로 나섰다. 김숭실 한국마사회 코치, 김민희, 박차라, 이은희 등 제자들을 아시아선수 역으로 출연시켰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헝가리 등 유럽선수들은 영국탁구협회에 의뢰해 실제 선수들로 초청, 섭외했다. '탁구인' 현 전무답게 탁구신에 절대적인 공을 들였다. 포핸드 드라이브, 백핸드 드라이브…, 탁구 장면의 리얼리티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다.

'코리아' 영화 기획, 배우 섭외 및 훈련, 개봉, 홍보까지 자문료, 개런티 없이 무보수를 자청했다. 돈으로 환산하면 수억원도 모자랄 일이다. "내가 배우를 할 것도 아니고 이 모든 것이 탁구를 위한 것"이라며 웃었다. "돈을 받고 했다면 오히려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진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현 전무의 진심에 배우들 역시 진심으로 화답했다. 시사회장에서 "탁구선수 여러분, 존경합니다"라며 고개 숙인 배두나는, 시사회 후 "선수들에게 전해주세요"라며 현 전무에게 초콜릿 박스를 건넸다.


◇영화 '코리아'에서 현정화 역할을 맡아 열연을 펼친 하지원.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지바세계선수권의 그날 '진실 혹은 허구'

물론 영화 내용은 팩트와 픽션 사이를 분주하게 오간다. "남북 선수 사이에 실제로 로맨스는 존재했다" "영화처럼 남북 대표팀이 실제로 싸운 일은 없었다" "분희언니가 B형 간염을 앓았던 건 사실이다. 영화처럼 경기중 넘어지진 않았다" "중국과의 결승전에서 연속 폴트 판정은 사실이다"라고 증언했다. "아버지가 주신 반지를 리분희에게 이별선물로 준 것" 역시 절반의 진실이다. "내 이름을 새긴 금반지를 미리 선물로 준비해갔었다"고 했다. 세계선수권에서 복식은 5세트 기준 3세트에 시행되지만 영화에서는 마지막 세트로 설정됐다. '현정화-리분희' 조합이 엮어낼 감동을 위해서다. 현정화, 리분희, 유순복으로 구성된 여자단체전 결승에서 코리아팀은 풀세트 접전 끝에 3대2로 이겼다. 실제 복식에서 현정화-리분희는 졌다. 그러나 영화에선 이겼다.

현 전무는 개의치 않았다. "영화적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다. 어차피 다큐가 아니지 않나. 사실 여부는 중요치 않다. 문제는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진정성이다." 그녀가 말하는 진정성은 최고의 순간, 최악의 이별을 받아들여야 했던 가슴 아픈 '숙명'에 관한 것이다. 현 전무는 여자단식 금메달을 목에 건 1993년 예테보리세계선수권을 끝으로 20년째 '분희 언니'를 만나지 못했다.


◇1991년 4월 28일 일본 지바세계선수권 남북 단일팀으로 중국과의 결승전에 나선 현정화(오른쪽)-리분희 복식조.

◇하지원(오른쪽)과 배두나가 영화 코리아에서 각각 대한민국 에이스 현정화와 북한 에이스 리분희 역할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독종' 현정화-하지원. '의리'로 통하다

'영화 속 현정화' 하지원은 열살 위 현 전무를 서슴없이 '언니'라고 부른다. 사우나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의 '진정성'을 확인한 후 급속도로 친해졌다. 현 전무는 "서로에게 꽂혔다"는 직설화법으로 친밀감을 나타냈다. 강인한 포스를 갖춘 배우 하지원을 적극 추천한 건 현 전무였지만, 당연히 처음부터 '절친'은 아니었다. 하지원은 인기 절정의 드라마 '시크릿가든'을 마친 후, 지친 몸으로 '코리아' 촬영에 임했다. 시나리오가 너무 좋았다. 하지만 탁구대 앞에 선 하지원은 이내 좌절했다. 복싱, 에어로빅, 스턴트까지 '스포츠 전문배우' 하지원을 향한 주변의 기대치가 높았다. "탁구가 나와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하차' 결심을 하고 스태프들과 마지막 회식을 했다. '패닉이 왔다'는 하지원을 향해 현 전무가 말했다. "지원씨 그건 좋은 거예요. 아직 열정이 남아 있다는 뜻이니까." 하지원은 다시 테이블 앞에 섰다. 독종과 의리, '탁구인' 현정화와 '여배우' 하지원을 하나로 묶어주는 말이다. 동료배우 박철민의 증언대로 둘다 못말리는 독종이다. 훈련 내내 "쉬겠다"는 말도 "쉬라"는 말도 먼저 하지 않았다. 지고는 못사는 승부욕과 완벽주의가 놀랄 만큼 빼닮았다. 영화 속 하지원이 현정화처럼 짧고 강렬한 "화이팅!"을 외칠 때, 선수 시절 현정화처럼 짧은 소매를 습관처럼 걷어붙일 때, 그 연기의 디테일은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영화 밖 두 철녀는 '의리'로 뭉쳤다. 공통점이 많다. 한번 믿기로 작정하면 무조건 '무한신뢰'다. 서로의 일이라면 열일 제치고 달려간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고 지지한다. 정상에 서 있지만, 난 체하지도 엄살 떨지도 않는다. 소탈한 웃음과 따뜻한 가슴을 지녔다.

현 전무는 요즘 '세상에서 가장 바쁜 여인'이다. 내달 3일 '코리아'의 개봉을 앞두고 토크쇼 출연부터 무대인사까지 홍보 스케줄이 빡빡하다. 런던올림픽의 해, 탁구협회 전무로서 대표팀 일정도 꼼꼼히 챙겨야 한다. 얼마 전엔 '크로커다일' 여성복 화보도 찍었다. 모델료 500만원 전액을 유소년 탁구 장학금으로 쾌척했다. 20일엔 일본 지바 시사회 참석, 21일 오후엔 과천 경마공원 시사회에 하지원, 한국마사회 선수들과 함께 나선다. 그녀의 첫번째 책도 조만간 출간된다. 무례한 '대필' 질문에 "나는 뭐든 내가 해야 한다. 밤마다 혼자 A4 용지에 글을 메웠다. 쓰다 보니 내가 글을 제법 쓰더라"며 하하 웃었다. 탁구를 사랑하게 된 영화배우와 영화를 사랑하게 된 탁구감독은 '코리아' 탁구팀도 만들 계획이다. "탁구와 영화를 계기로 만난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며, 탁구 붐을 다시 지필 생각"이라고 귀띔했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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