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여자탁구 '감동의 4강' 이끈 세가지 힘

전영지 기자

기사입력 2012-04-02 09:20



한국 여자탁구는 전통적으로 강했다. 1973년 사라예보세계선수권에서 구기종목 첫 금메달을 안겨준 건 이에리사-정현숙이 속한 여자대표팀이었다. 1987년 뉴델리세계선수권에서 현정화-양영자 복식조가 세계 정상에 섰고, 1993년 예테보리세계선수권에선 현정화가 여자단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2004년 이후 격년제로 열린 세계선수권 단체전에서 여자대표팀은 부진했다. 남자대표팀이 꾸준히 중국에 이어 2-3위 자리를 지켜온 데 비해 여자대표팀은 번번이 4강 진출에 실패했다.

2일 새벽 막을 내린 독일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단체전)에서 한국 남녀탁구는 8년만에 동반 4강 진출에 성공하며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지난 2004년 카타르 도하 대회 이후 8년만에 4강에 오른 여자탁구의 약진이 돋보였다. 김경아(35·대한항공·세계 16위)-석하정(27·대한항공·세계 24위)-당예서(31·대한항공·세계 43위)-박미영(31·삼성생명·세계 23위)-양하은(18·대한항공·세계 26위)으로 구성된 여자대표팀은 8강에서 풀세트 접전끝에 난적 일본을 3대2로 꺾었다. '도르트문트의 드라마'로 명명될 만큼 짜릿한 역전승이었다. 비록 4강에서 싱가포르에 2대3으로 패하며, 결승행에 실패했지만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는, 팽팽한 명승부를 보여줬다. 여자탁구 4강을 이끈 3가지 힘을 짚었다.

'35세 에이스' 김경아의 투혼

여자탁구의 4강의 일등공신은 '맏언니' 김경아다. 세계 최강의 수비형 에이스인 김경아는 이번 대회 한국탁구의 투혼을 보여줬다. 35세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체력과 근성을 보여줬다. 한국은 일본과의 8강전에서 세계 6위 이시카와 가스미, 세계 11위 후쿠하라 아이 등을 상대로 2세트를 먼저 내주고 3세트를 연거푸 따내는 대역전 드라마를 완성했다. 김경아는 첫번째 단식과 마지막 단식 주자로 나섰다. 1단식에서 후쿠하라 아이에게 2-3으로 졌다. 명운이 걸린 마지막 5단식에서 이를 악물었다. 왼손 전형 이시카와에게 4-8 더블스코어로 밀리는 상황에서 5점을 연거푸 따내며 9-8로 승부를 뒤집었다. 이시카와가 다시 2점을 따내며 10-9, 매치포인트에 먼저 도달했지만, 김경아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10-10, 11-10, …13-12… 결국 피말리는 듀스 접전은 14-12로 종결됐다. "여기서 물러났다가는 길이 없겠다. 무조건 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2년전 모스크바세계선수권 8강에서 일본에 2대3으로 지며 5위에 그친 아픔을 보란듯이 설욕했다. 싱가포르의 결승전 5단식 마지막 세트에서도 그녀는 악바리 근성으로 끝까지 따라붙었다. 강력한 체력을 앞세운 왕유에구(세계 16위)와 맞붙었다. 5-9의 스코어를 9-9까지 따라잡는 뒷심을 보여줬다. 녹색테이블 아래로 몸을 던지는 투혼에 관중석에선 박수가 쏟아졌다. 모처럼 잡은 역전의 흐름을 끊는 '촉진룰(한 세트가 10분을 넘어설 경우 경기시간 지연을 막기 위해 서브권을 가진 선수가 13구 안에 득점하지 못하면 자동실점하는 룰)'이 적용되지 않았더라면 또 한번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귀화 에이스' 석하정-당예서의 분전

당예서와 석하정은 중국 귀화 에이스다. 올림픽 무대를 꿈꾸며 기꺼이 국적을 바꿨다. 당예서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단체전에서 이미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석하정은 아직 올림픽 무대를 밟지 못했다. 김경아-박미영이 런던행을 확정한 가운데 남은 한자리를 놓고 석하정, 당예서, 양하은 등이 경쟁중이다.

석하정은 이번 대회에서 거의 전경기를 소화했다. 30대인 김경아-당예서보다 어리고, 체력적으로 강한 석하정은 일본, 싱가포르전에서 5단식 가운데 2경기(2-4단식)를 뛰었다. 명실상부한 주전이었다. 일본과의 8강전 4단식에서 후쿠하라를 돌려세우며 역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강희찬 여자대표팀 감독은 "하정이가 세계선수권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주전으로 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실력, 경험적인 면에서 도움이 됐을 뿐 아니라 국가대표로서 책임감, 사명감이 많이 생겼을 것" 이라고 귀띔했다. 일본전에서 2세트를 먼저 내준 직후 승부처가 됐던 3단식 주자로 나서 '승리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낸 당예서에 대해서는 "집중력이 확인됐다"고 치하했다. 이번 대회 '수비 에이스' 박미영은 주전으로 뛰지 않았다. 강 감독은 "(박미영을)얼마든지 기용할 수 있었지만 수비전형과의 잦은 경기는 오히려 공격선수들을 적응시켜주는 효과를 주게 된다"고 설명했다. 전력노출을 꺼렸다. 올림픽을 앞두고 '에이스' 박미영을 아꼈다.



'선수부터 단장까지' 집단지성의 힘


매경기 한국 벤치에는 강 감독과 함께 출전선수를 제외한 4명의 선수가 나란히 앉았다. 짧은 작전타임이지만 감독의 일방적인 지시는 없었다. 오히려 선수들이 '멘토'로 나섰다. 자신의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싱가포르와의 4강전, 세계 6위 펑톈웨이와 맞붙은 '언니' 석하정에게 가장 많은 조언을 건넨 이는 '막내' 양하은이었다. 지난해 카타르오픈 32강에서 펑톈웨이를 4대2로 돌려세웠던 경험을 아낌없이 전수했다. 현지 중계를 맡은 해설자 역시 "10대 양하은이 코치로 나섰다"며 관심을 표했다. 강 감독은 "석하정과 비슷한 스타일의 공격전형 선수이고 국내외에서 자주 손발을 맞추는 복식 파트너로서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선수들에게 벤치에서 서로 많은 이야기를 해주라고 주문했다. 감독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선수 입장에서 짚어줄 수 있고, 단체전에 필요한 팀워크나 단결력에도 도움이 됐다"고 평가했다.

이번 대회 단장을 맡은 정현숙 한국여성스포츠회 회장과 총감독을 맡은 현정화 대한탁구협회 전무는 에이스 출신 임원으로서 경기 기간 내내 선수들을 지지하고 지원했다. 존재만으로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여자탁구 레전드'답게 현장에서 허물없는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관중석에선 가장 큰 목소리로 후배들의 파이팅을 독려했다. 강 감독은 "단장, 총감독 이하 선수들까지 모두 하나로 합심한 것이 4강 진출에 힘이 됐다"며 웃었다. 이제 한마음으로 똘똘 뭉친 여자대표팀의 다음 미션은 런던올림픽 단체전 메달이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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