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된 대사로 관객 상상력 자극 영화 '섬'
기사입력 2000년 04월 16일 15시 31분
김기덕 감독은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는 스크린 밖에서는 논쟁적이다가도 자신의 영화 안에서는 말을 아끼는 감독이다. 대개 한국 영화가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과제 중의 하나가 소화할 수 없는 작의(作意)의 거창함과 의욕 과잉이라 할 수 있는데, 김기덕 감독은 자기 조절 능력이 뛰어나다. 덕분에 그의 영화는 그 자체로서 맑고 개운한 목소리를 갖는다.
김기덕 감독의 네번째 작품 `섬'은 말이 없는 영화다. 전반적으로 대사의 양이 적다. 특히 영화의 핵심 인물인 희진(서 정)의 경우 단지 외마디 날카로운 비명 소리만 있을 뿐 단 한마디의 대사조차 없다. 이 `말없음'은 관객에게 곧바로 전이되고 말아, 관객 또한 감상의 변을 토할 마땅한 근거조차 찾지 못한 채 극장을 나서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침묵 속에서 `경악'과 `전율'을 여러번 느낄 것이라는 점이다.
날마다 호기심 속에서 새 영화와 마주하지만 `섬'처럼 나를 자극한 영화는 없었다.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독이 있기 마련인가? 그것은 인간 또는 사물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깊은 곳에 잠재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는 집착과 소유, 그리고 위안의 세계와도 같다.
앞질러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대단히 중요하다.
`섬'에는 등장 인물이 많지 않은 영화가 범하기 쉬운 카메라의 느슨함이 엿보인다. 자해적이고 자극적인 방법 외에 인물 상호간의 내적 긴장 관계를 밀도있게 구축하는 연출력이 아쉽다.
그렇다고 새로운 감수성이 빛나는 뛰어난 작품으로서의 `창조적인 놀라움'이 결코 구름에 가리는 것은 아니다.
`섬'이 돋보이는 이유는 저예산 영화를 고집하는 희귀한 작업 태도 때문도 아니다. 그 다른 영화가 그런 것처럼, 그것은 저예산 영화의 작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영화 예술의 새로운 지향성에 대한 독창적인 비전의 제시, 예술적 에너지의 분출에서 기인한다.
고정관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이르는 엽기적이고도 독기서린 시선과 독특한 스타일의 추구, 대사와 언어를 대신하는 새로운 이미지 개발 등이 `섬'에 가장 잘 집약되어 있다.
`섬'에서 김기덕 감독이 보여준 대사와 개연성을 압축하고 뛰어넘는 솜씨는 시(詩)의 상상력을 연상케 한다. 이미지를 전개하고 함의하는 기법은 내러티브에 갇힌 관객에게 원초적인 영화적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준다. (22일, 시네코아 명보 녹색 시티 등)
[양윤모의 시네마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