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조국과 동포 (16)

기사입력 2000년 03월 21일 15시 12분


다음날 오전 10시 정각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방을 울렸다. 이대진이 금방
전화기를 귀에 붙였을 때 여자가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소양강인데요, 들어가도 될까요？"

엉겁결에 문쪽을 바라본 이대진이 그러라고 대답하자 곧 전화는 끊겼다.
그로부터 5분쯤 후에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연 이대진은 커다
란 종이 봉투를 가슴에 안고있는 여자를 보았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웃음띤 얼굴로 인사 했지만 이대진은 그냥 머리만 끄덕이며 비껴섰
다. 앞을 스치고 방으로 들어서는 여자 한테서 옅은 향수 냄새가 맡아졌
다. 큰 키에 날씬한 몸매였고 옅은 무늬가 있는 진주색 투피스도 세련되었
다.

식료품이 담긴 봉투를 주방의 식탁 위에 내려놓은 여자가 이대진을 향해
돌아섰다.

검은 눈동자가 똑바로 이대진을 향해져 있다.

"전 고윤희라고 합니다. 소양강이란 암호는 박선생이 잘 부르는 소양강처
녀 노래에서 따온 것 같아요."

"암호야 어떻든."

머리를 끄덕인 이대진이 식탁의 의자에 앉아 앞쪽을 가리켰다.

"앉으세요. 조선족이신가요？"

"네. 옌벤이 고향인데 한국일을 한 지 4년 되었어요."

한국일이란 국정원의 일인 것 같았으므로 이대진은 마음이 놓였다. 정색하
고 앉은 고윤희의 얼굴에는 화장 흔적이 없었지만 피부에는 윤기가 났고 엷
은 입술은 붉었다. 이대진의 시선을 받은 고윤희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
다.

"여자가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으신 모양이죠？"

"그래요."

"우린 관광객과 함께 빠져 나가야 해요. 부부가 되어서 말예요."

"노인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고윤희가 식료품 봉투 안에서 제법 투툼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 사이에 끼워 넣는 거죠. 이틀 후에 35명의 관광객이
도착합니다."

"한국에서 말이요？"

"네. 그러면 관광객 인원은 42명이 되는 거죠. 노인 다섯명과 우리 둘을
포함해서 말예요."

긴장한 이대진이 머리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 35명의 관광객은 우리들의 계획을 압니까？"

그러자 고윤희가 머리를 저었다.

"모릅니다. 그들은 여행사의 중국여행 특별할인 코스에 응모했다가 당첨
된 사람들이에요."

고윤희가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보였다.

"신혼부부가 3쌍, 30대에서 50대까지의 부부가 5쌍, 그리고 30대에서 50대
까지의 남녀가 각각 5명과 4명, 거기에 마지막으로 60대 할머니가 8명, 70
대 할아버지가 2명이예요."

"그러면 노인 5명은 60대 할머니들과 자연스럽게 짝이 되겠군."

"노인들에게 미리 교육을 시켜놓아야 해요. 베이징에 먼저와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탈북자라는 것이 알려지면 안됩니다."

"힘들텐데."

"옷도 새옷으로 사 입히고 제가 교육을 시키겠어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이제 고윤희와 한배를 타게 된 이대진이 정색하고 물었다.

"비행기는 탈 수 없을 텐데."

"버스로."

고윤희가 봉투에서 꺼낸 지도를 이대진의 앞에 흔들어 보였다.

"본래 버스 여행으로 관광객을 모았으니까요. 여행사에서 45인승 리무진
버스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이대진은 길게 숨을 뱉았다. 이만하면 치밀한 작전인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