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조국과 동포 (11)

기사입력 2000년 03월 15일 13시 52분


전화기를 내려놓은 이대진은 길게 숨을 뱉았다. 이곳은 내성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오피스 빌딩 안이어서 창밖으로 활기띤 거리가 다 보였다.

박장호는 한국 사업가가 빌려놓은 오피스텔 형식의 20평형 사무실을 그의 임시 거처로 제공해준 것이다. 이제는 숨어 지내야할 형편이 되어서 호텔방에 남겨둔 짐은 찾을 수도 없는 터라 당장에 필요한 생필품은 사야만 한다.

소파에 앉은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마 노정수가 안동성과 자신과의 관계를 폭로했을 것이고 그것을 보고받은 본부에서 중국 대사관 쪽에 연락했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설픈 영웅심으로 국가관계에 해를 입히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벽시계가 오후 5시를 가리킬 때까지 기다렸던 이대진은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세번 울렸을 때 오성호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국은 오후 4시일 것이다.

"나야, 정현희는 도착했나?"

"보스."

소리치듯 대답했다가 주위를 의식한 듯 오성호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낮아졌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어디긴 베이징이지. 정현희가 도착 했느냐고 물었다."

"지금 공항에서 이쪽으로 오고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공항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배신당했어."

"어, 어떻게 말입니까?"

이대진이 설명해주는 동안 오성호는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윽고 오성호가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실겁니까?"

"국정원 직원이 도와주고 있어. 내 생각이지만 이것도 정부의 정책인 것 같다. 한쪽은 그렇게 나가지만 다른 쪽은 서로 모르게 움직이는 것이 말이야."

"결국 보스는 끝장을 보시겠단 말씀이군요."

"네가 그 노인들을 봤더라도 나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저희들이 할 일이 있습니까?"

"외교부의 안동성과장을 만나서 상황을 전해줘라. 궁금해 할테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돈을 10만 달러만 송금해."

"알겠습니다. 예정 루트로 내일 보내지요."

"정현희나 직원들 입단속을 철저히 시켜."

전화기를 내려놓은 이대진은 길게 숨을 뱉았다. 정현희가 무사히 서울에 도착한 것에 마음이 놓였고 오성호의 목소리를 듣자 기운도 났다. 그러나 이쪽은 사방에 적이다.

납치범이나 다름없는 장용수 일당은 물론이고 중국의 공안당국 그리고 북한의 탈북자 사냥꾼들이 쫓고 있었으며 대사관측도 마찬가지 였다. 다만 국정원의 은밀한 지원이 단 한줄기의 희망이었다.

저녁 7시가 되었을 때 박장호는 식료품을 한보따리 사들고 들어섰는데 표정이 어두웠다.

"이형, 골치아프게 되었소. 공안당국이 이형에 대한 수배령을 내릴 모양이요."

"무슨 죄명으로 그런답니까?"

봉투에서 마실 것을 꺼내 마개를 따면서 이대진이 웃어 보였다.

"밀입국자 밀수 기도 혐의인가?"

"이봐요. 웃을 일이 아뇨."

정색한 박장호가 털썩 소파에 앉았다.

"인터내셔널 호텔에 공안하고 북한 공작원들이 가득 깔려있단 말이요. 분위기가 심상치않습니다."

"뭐, 사건이 클수록 괜찮은 점도 있을 것 아닙니까? 언론에서 터뜨려 줄텐데."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박장호가 머리를 저었다.

"북한 놈들은 이형을 잡으면 그 노인들의 거처를 알아내려고 할거요. 이거 아무래도 그냥 이형을 보내 버리는 건데."

그러자 이대진이 생각난 듯 말했다.

"오늘로 또 5000위안이 늘었군. 이제 27만 위안이 되었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