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리포트] 유재순 일본통신 - 장수국 일본(1)
기사입력 2000년 02월 13일 15시 27분
"앞을 보기 싫어. 보면 사진 속에서 언니가 살아 튀어 나올것만 같아…"
고개를 떨군 채 웅얼거리듯 겨우 말을 잇는 할머니. 웅크리면 한 품에라도 안길 듯 아주 작은 몸집이었다. 손에는 항상 염주를 쥔 채였다. '나미아불타불'을 열심히 읊조리고 있는 모습. TV를 통해 이 애처로운 모습을 지켜보던 일본 국민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눈물을 떨궈야 했다.
지난달 23일, 약 8년동안 장수국 일본의 상징이자 전국민적 스타였던 한 할머니가 잠을 자듯이 조용히 숨을 거뒀다. 일본언론은 즉각 이같은 소식을 보도했고, 할머니의 빈소가 차려진 나고야의 집은 전국으로부터 몰려든 매스컴 관계자들로 북적거렸다.
일명 킨상, 긴상으로 불리워졌던 쌍둥이 할머니 자매. 올해 108세를 맞이하지만 한국나이로 치면 109세가 된다. 바로 이 쌍둥이 할머니 중 언니인 킨할머니가 세상을 버린 것이다. 만 107년간 생사고락을 같이 해왔던 분신과도 같은 킨언니의 죽음, 동생인 긴할머니는 당연히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긴할머니는 빈소에 와서 단 한 번도 언니의 영정(사진)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래서 기자들이 물었다. 왜 언니의 영정을 한 번도 보지 않느냐고(긴할머니가 앉은 자리는 고개만 들면 정면으로 영정이 보이는 자리였다). 질문을 받자 긴할머니가 울먹이는 소리로, 언니가 사진속에서 튀어나올까봐 무서워서 고개를 못 들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 다음부터 일본기자들은 장례식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긴할머니에게 두 번 다시 똑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나리타 킨(成田金)할머니와 긴(銀)할머니. 이 두 할머니는 고령국이자 장수국인 일본사회가 낳은 전국민적 인기스타였다. 100세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지방도시인 나고야에서 그저 평범한 할머니로 살아왔던 이들이었다. 쌍둥이라는 것만 빼고는 특색이라고는 전혀 없는 전형적인 일본 할머니였다. 그런데 100세를 맞이하면서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일본의 인기스타가 됐던 것.
1992년 9월 경로의 날, 나고야시장과 나고야시가 속해 있는 아이치현 지사는 뭔가 이색적인 이벤트행사를 생각하다가 이듬해 100세를 맞이하는 쌍둥이할머니를 찾아뵙기로 했다. 물론 정치적인 행정가답게 언론에게도 이같은 사실을 두루 알렸다.
일본에는 100세 이상이 된 노인만해도 1만 명이 넘었다. 때문에 100세를 맞는 노인에게 지사가 직접 찾아 보고 인사를 하는 것은 그리 새로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달랐다. 100세가 된 노인들 중에서도 일란성 쌍둥이 할머니였다. 아무리 장수국 일본이라 하지만 쌍둥이 할머니 모두 건강하게 100세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 언론도 나고야시장과 아이치현지사의 쌍둥이할머니집 방문을 대서특필했다. 게다가 이 두 할머니는 매스컴이 좋아할만한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키가 1@50㎝도 안되는 조그마한 몸집에 곱상하게 생긴 얼굴. 까르르 웃을 때마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를 연상시키는 순진무구함. 여기저기 수없이 퍼붓는 기자들의 질문에 즉흥적으로 내뱉는 동문서답하는 짖꿎은 대꾸. 아무리 피곤해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자신들을 찾아준 이들에 대해 늘 공손하게 감사함을 표시하는 깍듯한 예의와 세심한 배려. 일본 국민들은 이같은 쌍둥이 할머니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하고 즐거워 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이 할머니들이 귀엽다고 난리였다. 인기인 순위 조사에서도 이들 할머니는 연예인들을 제치고 늘 상위권에 들었다. 덕분에 킨할머니, 긴할머니 쌍둥이 자매는 하루아침에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인기스타가 되었다. TV에 안 나오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일본 국민들을 가장 즐겁게 해준 것은 100세가 된 이들 쌍둥이할머니가 날고 긴다는 일본기자들을 매번 골탕먹이는 재치였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TV기자가 쌍둥이 할머니에게 짖꿎은 질문을 했다. 젊었을 적에 연애를 해 본적이 있느냐고.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