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전란 (31)

기사입력 1997년 05월 31일 14시 08분


축시무렵이었으니 새벽 한시쯤이다.

성밖의 바닷가로 통하는 길가에 불에 탄 역관(驛館)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관이 되었다.

주위에 민가도 없었으므로 멀리서 들개 짓는 소리만 들려올뿐 주위는 짙은 정적에 묻혀 있었다.

윤의충은 역관의 기둥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호위군사는 모두 관저로 보냈으므로 뒤쪽에 매어놓은 말이 가끔 투레질을 할뿐이다.

별빛만 빛나는 밤이었다. 이윽고 멀리서 희미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고 곧 가까워졌다.

말은 곧장 역관 앞으로 달려오더니 앞발을 곤두세우며 멈춰섰다. 말에서 가볍게 뛰어 내린 것은 안화옥이다.

어둠에 익숙해 있는지 그녀는 곧장 윤의충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저고리에 바지 차림으로 아까와는 전혀 다른 차림이었고 분위기였다.

"장군께 무례한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녀가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오늘 꼭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

윤의충이 한 걸음 다가섰다. 이제 별빛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가 보였다.

"대감 모르시게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이런 곳이 말씀 하시기가 낫소?"

"목사관 안에는 사람들 이목이 있어서."

머리를 끄덕인 윤의충이 시선을 비켰다.

"급한 일이신 것 같습니다."

"소녀는 정을 준 사내가 있습니다."

시선이 마주치자 이제는 그녀가 비켰다.

"아버님께선 아직 모르시기 때문에 장군께 부담을 드린 것 같습니다. 부디 오늘밤의 일은 잊으십시오."

"…."

"아버님은 시중대감의 측신이신 장군께 두마음이 없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셨습니다. 저는 난세의 인질이 되었지요."

"…."

"그만큼 배신이 흔한 세상 탓이겠지요. 하오나 아비의 충심은 그것으로 믿어 주소서."

이윽고 윤의충이 머리를 끄덕였다.

"과연 병서를 읽어온 사람답구려."

그가 반걸음쯤 다가가 섰으므로 안화옥의 코끝이 가슴에 닿았다.

"허나 병법에 긴 진용은 허리가 잘린다는 말이 있을 거요."

"…."

"낭자의 말이 깁니다. 그만큼 허점도 많고."

윤의충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대감께서 두마음이 없으시다는것은 이미 알고 있었소. 그러니 오늘밤 일은 모두 잊어도 됩니다."

"고맙습니다. 장군."

"낭자의 정인(情人)이야기도."

"…."

"결코 훼방하지 않으리다."

막 윤의충이 몸을 돌렸을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 허점이 무엇입니까?"

윤의충의 시선을 잡은 그녀가 다시 물었다.

"긴말의 어디에 허점이 있었습니까?"

"난 검객이오."

윤의충의 시선이 그녀를 잡았다.

"상대방의 눈빛을 보고 칼을 뿌리는 검술을 배웠지요. 그 찰나를 놓치면 내가 베임을 당합니다."

"…."

"길게 겨누고 있으면 허점이 많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나는 낭자의 눈을 읽었소."

다시 이를 드러내고 웃은 윤의충이 몸을 돌렸다.

"칼을 뽑은 것도 아니니 말승부는 이것으로 끝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