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악귀상륙 (18)
기사입력 1997년 03월 11일 14시 59분
개경유수 병마사 박황은 장군으로 정4품이었다. 본래 유수병마사는 정3품의 상장군이나 못하면 종3품의 대장군이 차지하는 자리였다.그런데 개경은 특별한 지역이다. 타지역과 비교하여 치안이 안정되지 않아 누구도 꺼려하는 곳인데다 이제까지 공석이었다. 김준이 자신의 심복 박황을 보낸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이었다. 박황은 30대 후반으로 본래 무반의 집안이다. 아비가 정5품의 중랑장으로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유서있는 가문이었다. 박황이 서둘러 사저로 돌아온 것은 진시 무렵이다. 사저라고 해야 임시 집무소로 쓰고 있는 옛 중서성 건물의 안채였으니 문 하나만 넘으면 되었다. 가죽 허리 받침을 털럭이며 사저의 내실로 들어선 그는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허리에 찬 장검을 풀어 옆에 내려놓았다. 호흡이 조금 가쁜 그의 얼굴은 전형적인 무인다웠다. 부리부리한 눈에 코가 우람했고 수염이 짙었다. 다만 입술이 조금 얇았으나 굳게 다물 때면 결단력이 있게 보였다. 옆쪽의 미닫이가 열렸으므로 박황은 머리를 들었다. 방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선 사내는 윤의충이다. 그는 박황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하고는 마주보고 앉았다. "교위 윤의충입니다. 장군." "들었다. 진즉 대감으로부터 밀지를 받은 터 기다리고 있었다." 윤의충이 가슴 속에서 조그만 주머니를 꺼내어 앞으로 밀어놓았다. "대감의 증표 올시다." 밀사에게 준 김준의 증표이다. 대나무 조각에 김준이 친필로 자신의 이름을 써 놓은 것이다. 징표를 확인한 박황이 머리를 끄덕였다. "오탄은 도태일에게 당한 것 같다. 그런데 도태일 일당을 벤 것은 자넨가?" "그렇소이다. 장군." "그런 줄 짐작했어." 박황이 만족한 듯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솜씨가 대단하다. 왕창국이 지금도 눈을 까뒤집고 있어. 놈은 왕창국의 양자였거든." "…." "그런데 도태일은 어떻게 처리했나?" "목을 베었소이다. 장군." "어디에서?" "동문 밖이오. 놈은 산에 묻었소이다." "잘했어. 그런데 자네 부하들은 어디 있나?" "성밖에 숨어 있소이다." 다시 머리를 끄덕인 박황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도울 일은 없을 것 같군. 이미 사건을 해결해 버렸으니." 그렇다고 박황이 친몽 세력에 공공연한 도전을 할 수는 없다. 왕창국의 기마군이 주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 왕도 도전행위를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몽골의 끈질긴 위협으로 곧 출륙이 이뤄지려는 상황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친 몽골세력의 승리이자 고려정권의 완전한 몽골예속인 것이다. 이미 몽골의 쿠빌라이는 고려왕에게 고려에 반역한 친몽자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라는 교서를 내린 바가 있다.
윤의충이 머리를 들었다. "장군. 도와주실 일이 있소이다." "무언가?" "역관 황판을 치겠소이다." 퍼뜩 눈을 치켜떴던 박황이 이윽고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며 웃었다. "황판이라. 거물이지. 좋은 목표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