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채 흔들리는 한국축구, 뿌리부터 바꿔야 한다

정현석 기자

기사입력 2017-10-11 00:31


지동원과 태극전사들.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아이가 운다. 아빠는 냉정하다.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아이는 암담하다. 사력을 다해 아빠의 눈에 들고 싶지만 능력이 없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빠의 윽박지름. 아이는 점점 더 위축된다. 잘하려 할수록 부담감에 실수만 연발된다. 이 모습이 못 마땅한 아빠의 목소리는 점점 커진다.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A대표팀이 처한 악순환 고리다. 아이는 대표팀 선수들, 아빠는 국내 축구팬이다.

한국 대표팀, 또 졌다. 완패였다. 러시아전 2대4 패배에 이어 모로코전에서도 초반 2실점을 극복하지 못한 채 1대3으로 졌다. FIFA랭킹에서 한국(51위)보다 낮은 모로코(56위)는 러시아보다 강했다. 시종일관 한국을 압도했다. 유기적 공간 활용 속에 빠른 템포로 한국이 골문을 끊임 없이 위협했다. 대비되는 장면이 있었다. 모로코 선수들은 여유가 있었다. 반면, 그 여유가 한국 선수들에겐 없었다. 허둥지둥 대는 모습이 포착됐다. 상대팀 선수보다 심리적 압박에 더 많이 눌린 모습이었다. 월드컵 본선 무대로 가는 과정에 불과한 평가전. 부담 없이 펄펄 날며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할 선수들은 마치 본선 무대 처럼 경직돼 있었다. 고비마다 허둥거렸다. 왜 그랬을까. 그 배경에는 최종예선 2경기로부터 이어진 '히딩크 논란'이 있다. 지구 건너편 히딩크는 본의 아니게 '댓글'을 통해 끊임없이 대표팀을 흔들었다. 대표팀이 경기를 할 때마다 마치 정해진 듯 '신태용을 내리고 히딩크를 모셔오라'는 비판적 댓글이 달렸다. 김영권, 김주영 등 말실수, 몸실수를 한 선수에 대한 관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끊임 없는 마녀사냥 속에 부담을 느낀 선수들의 플레이는 갈수록 화석처럼 굳어갔다.


유감스럽지만 이런 흐름이 이어진다면 러시아 월드컵에서 한국의 선전은 기대하기 힘들다. 본선 무대서 만날 세계적인 팀들은 적어도 우리보다는 강하다. 자신감 있게 맘껏 뛰어도 모자랄 판에 주눅든 다윗이 마음 편한 골리앗을 제압하는 기적을 발휘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렇다고 8개월 앞으로 다가온 본선까지 선수 개개인이 환골탈태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수비수 한명을 벗겨내기도 힘든 개인기가 갑자기 생길 리도 만무하다. 그저 현재의 개인 능력에 조직력을 보태는 정도다. 그러니 이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잘해 보라'고 자신감을 북돋워 주는 수 밖에 없다.

진정 한국축구의 변화를 원한다면 아주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뿌리부터 뒤집어야 한다. 장기적 안목의 시간과 돈의 투자가 뒷받침 돼야 한다. 모로코 전을 치른 날, 사상 첫 월드컵 진출의 감격을 안은 아이슬란드 축구가 롤모델이 될 수 있다. 역대 월드컵 진출국 중 최소인구인 34만 명에 불과한 아이슬란드의 FIFA랭킹은 22위다. 100위권 밖에서 진입한 것이 불과 수년 새 일이다. 꾸준한 투자가 맺은 결실이었다. 오래 걸린 만큼 지속 가능한 변화다. 지난해 유럽리그에서 깜짝 놀랄 퍼포먼스로 주목받은 아이슬란드는 올해 월드컵 예선에서도 어김없이 화제의 중심이 됐다.

인구 소국의 반란. 그 배경에는 지도자와 유소년 육성이란 장기 투자가 있었다. 아이슬란드축구협회 등록선수는 2만 명이 넘는다. 인구 대비 축구 선수 비율이 높은 편이다. 축구 클럽도 상대적으로 많다. 프로 1부리그에는 12팀이 참가한다. 2부도 12팀, 3부도 7개 권역에 50팀이 있다. 1부는 추운 날씨 때문에 매년 5월부터 9월까지 짧게 리그를 치른다. A대표 선수들은 전부 해외리그에서 뛰고 있다.
아이슬란드 축구협회는 긴 안목으로 유소년과 지도자 육성에 투자했다. 비용은 전적으로 국가가 부담했다. 먼저 훌륭한 지도자 교육에 힘을 쏟았다. 지도자들에게 최신 축구 정보를 지속적으로 전달했고, 재교육을 진행했다. 나이 어린 지도자들에게는 UEFA(유럽축구연맹) 라이선스를 획득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런 노력 속에 양질의 지도자가 대거 탄생했다. UEFA A급 지도자 자격증 소지자가 180명에 육박했다. 이렇게 육성된 지도자들이 현장에 투입돼 유소년을 키웠다. 어릴 때부터 개인기를 익혔다. 국가는 어린 아이들에게 비용 부담없이 축구 등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스포츠 활동을 하면서 청소년들의 약물 남용, 흡연 등 이탈과 비행이 줄었다. 현재 아이슬란드는 학교 수업으로 5인제 축구를 가르친다. 수업 일정과 별도로 운영하는 축구 교실도 연령대별로 나눠 진행되고 있다. 추운 날씨를 극복하기 위한 실내 인조 잔디구장을 많이 만들었다. 학교에 미니 축구장을 지었다. 현재 100개 이상의 미니 축구장이 운영되고 있다.


바야흐로 한국축구는 기로에 섰다. 세계 축구의 발전 속도는 한국 축구의 발전 속도를 훌쩍 앞지른다.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위업에 안주할 틈이 없다.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다. 월드컵 1회 진출 팀 아이슬란드로 부터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 변화는 말로 이뤄지지 않는다. 책임 있는 정부 여당 인사도 여론에 편승해 무책임하게 한국축구를 비판하기에 앞서 인프라에 대한 국가의 지원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이에 발 맞춰 협회는 지도자와 유소년 육성을 위한 장기적 안목의 프로젝트를 실행해야 한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를 때다. 시작이 반이다. 큰 희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 월드컵 보다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 단언한다. 당장 뿌리부터 변화하지 않으면 뿌리 채 흔들리고 있는 한국축구의 미래는 없다.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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