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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서글한 눈매와 뽀얀 피부, 왠지 축구와 거리가 멀 것 같은 '착한 인상'이다.
"본선 티켓을 딴 만큼 다 잘했다. 특히 경기에 뛰지 않은 선수들이 묵묵히 잘해줬다. 같이 으샤으샤하며 마지막까지 동료애를 발휘해 줘 고마웠다." 그것으로 끝날 것 같았던 답변은 다시 이어졌다. "개인적으로는 박용우가 상당히 고맙다. 성실하면서도 영리한 플레이에 깜짝 놀랐다. 용우가 큰 힘이 됐다. 용우가 없었으면 원하는 전술 대처를 못했을 것이다."
신 감독은 최근 막을 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U-23) 챔피언십 겸 2016년 리우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팔색조 전술을 자랑했다. 조별리그와 8강전에서 4-4-2, 4-1-4-1, 4-2-3-1 시스템을 넘나들었고, 올림픽 티켓이 걸린 개최국 카타르와의 4강전(3대1 승)에선 3-4-3 카드를 꺼내들었다. 변화의 중심은 박용우였다. 그는 수비형 미드필더와 스리백의 중앙수비를 오가며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박용우를 3일 경기도 구리 GS챔피언스파크에서 만났다. '피곤할 것 같다'는 걱정에도 "충분히 쉬었다"며 말문을 연 그는 최용수호와 신태용호를 넘나들며 얘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포기한 올림픽
초등학교 3학년 때 축구를 시작한 박용우는 팔도를 유랑했다. 초등학교는 경기도(오마초)와 전남(광양제철남초), 중학교는 다시 경기도(백마중), 고등학교는 강원도(춘천기계공고), 대학교는 서울(건국대)에서 나왔다. '축구 DNA'를 타고났다. 아버지가 한일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한 박공재씨(54)다. 축구인 아버지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꽃은 피지 않았다. '엘리트 코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청소년대표에 한 번 발탁된 후 잘린 것이 전부다.
그저 그런 선수로 떨어질 찰라에 최용수 서울 감독이 손을 잡았다. 최 감독은 건국대와의 연습경기에서 박용우를 발견했고, 지난해 품에 안았다. 서울은 지난 시즌 포백을 꺼내들었지만 흔들리는 수비로 '슬로 스타트'가 재연됐다. 박용우가 중용된 것은 4월이다. 그는 스리백의 중앙과 수비형 미드필더를 모두 소화하며 주전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또래가 누비는 올림픽팀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최 감독이 계속해서 박용우를 홍보했지만 그의 자리는 없었다. "서울에서 출전 기회를 얻으면서 욕심도 있었다. 한 번 쯤은 뽑아주실 것 같았지만 늘 올림픽팀에 내 이름은 없었다. 포기하고 있었다."
운명은 11월 바뀌었다. 수비형 미드필더 이찬동(23·광주)이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고, 대체자로 낙점받았다. 서울에서 쌓은 기량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중국 우한에서 벌어진 4개국 친선대회에서 두 골을 터트리며 단번에 신 감독의 마음을 빼앗았다. 더 이상 '땜빵'이 아니었다. 카타르 도하에서의 길도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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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팀에선 늘 막내였다. "서울에선 늘 긴장이 됐다. 모두가 국가대표를 거친 최고의 선수들이다. 형들을 받쳐주며 피해를 주지 말자는 생각 뿐이었다." 23세 이하 또래와의 축구 세계는 또 다른 공간이었다. 말수도 늘고, 여유가 생겼다. "(연)제민이도 그렇지만 (권)창훈이는 워낙 착해 항상 맞춰주려고 했다. 움직임이 좋은 (류)승우는 자신의 움직을 잘 봐 패스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세 살 어린 (황)희찬이는 정말 물건인 것 같다. 앞에서 볼키핑도 잘하고 저돌적인 돌파로 후방을 편하게 해줬다…" 동료들 얘기가 나오자 자연스럽게 미소가 넘쳤다.
잊을 수 없는 경기는 카타르와의 4강전과 결승전인 한-일전이다. 박용우는 "요르단과의 8강전 후 경기력 때문에 외부에서 질책이 많았다. 감독님의 얼굴도 수척해져 있었다. 엘리베이트에서 만났는데 저한테 '잘하고 있다, 걱정하지마라'고 하셨다. 당신이 힘든 데도 그 말을 들으니 어떻게든 이겨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선수들에게도 이야기했다. 또 휘슬이 울리기 직전 다같이 모였을 때 (김)현이가 모두를 향해 7월(올림픽 본선 소집)에 보자고 해 소름이 돋았다. 카타르에 지면 뒤가 없다고 생각했다. 진짜 열심히 했다"고 설명했다.
8회 연속 올림픽 진출을 달성한 후 열린 한-일전은 또 달랐다. 결말은 아팠다. 2-0으로 리드하다 2대3으로 역전패 당했다. 그는 "아직도 자다가도 쉬다가도 생각난다. 혼자 열받는다"며 "처음에는 너무 신났다. 플레이도 너무 잘됐다. 그러나 점수 차를 내려고 한 욕심이 컸다.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리다보니 역습을 허용했다. 일본의 역습은 미팅 때 이미 알고 있었던 전술이었다"고 말한 후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이번 대회를 통해 느낀 점이 많다. 자신감을 많이 얻었다"고 덧붙였다.
박용우에 대해 제2의 기성용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기분은 좋은데 그 소리를 들은 후 욕도 많이 먹는다. '걔가 무슨 기성용이냐'며. 그래도 롤모델인 기성용처럼 정말 잘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
최용수와 신태용, 서울과 올림픽
박용우에게 '최용수란', 그는 "최고의 은인이다. 솔직히 대학교 때만 해도 그저 그런 선수였다. 프로에 데뷔시켜 주셨고, 프로선수를 만들어 주셨다. 프로에서 정말 기량이 많이 늘었다. 중앙 수비와 미드필더를 번갈아 기용해주셔서 올림픽팀에서도 큰 도움이 됐다"며 고마워했다. 박용우에게 '신태용이란', 그는 "힘들 때 힘을 많이 주시는 분이다. 또 다른 축구를 알려주신 분"이라고 웃었다.
박용우는 올해 '최용수와 신태용'을 모두 잡아야 한다. 신 감독은 소속팀에서 경기에 출전해야 최종엔트리에 발탁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와일드카드(24세 이상 선수) 3명을 제외하면 남은 자리는 15개 뿐이다. 그 키는 최 감독이 쥐고 있다.
그는 "팀에 좋은 선수들이 더 들어와 영광이다. 개인적으로 늘 존경했던 형들이다. 작년 FA컵 우승했을 때 기분이 너무 좋았다. 올해는 더 많은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다"고 했다. 8월 막을 올리는 리우올림픽에 대해서도 목표는 분명했다. "올림픽은 꿈의 무대다. 23세 이하 선수들 중 세계에서 잘하는 선수들이 모두 보인다. 물론 항상 걱정은 된다. 서울은 대한민국 최고의 클럽이다. 매년 주전경쟁을 해야 된다. 작년에는 그렇게 많이 뛸 줄 몰랐다. 올해도 욕심이 있다. 제 역할을 하면 기회가 올 것이다. 올림픽에서 뛰기 위해서라도 팀에서 더 뛰어야 한다."
박용우의 2016년은 올림픽 꿈으로 채워졌다. 이제 첫 발을 뗐을 뿐이다. "좀 더 터프해질 것"이라는 말이 그의 첫 출사표였다.
구리=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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