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원의 센터서클]남북 교류의 꽃 통일축구 그리고 정몽규 회장

김성원 기자

기사입력 2015-09-08 08:25



축구는 정치, 인종, 종교에서 부당한 간섭을 받지 않는다.

국제축구연맹(FIFA)의 정관에 명시돼 있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남북 축구, 이른바 대한민국과 북한 축구는 분단 70년의 역사만큼 '긴 사연'을 갖고 있다.

한국 전쟁의 아픔은 컸다. 갈등과 반목으로 철저하게 평행선을 걸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1960년 로마올림픽을 앞둔 1959년 남북 단일팀 구성을 결의했다. 하지만 휴전된 지 겨우 6년 밖에 흐르지 않았고, 앙금도 그대로였다. 한 배를 탈 수 없었다. 남북 단일팀은 무산됐다.

1960년대 북한이 국제 축구 무대에 등장했다.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 아시아지역예선에서 북한이 참가키로 하자, 대한민국은 불참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객관적인 전력상 북한보다 한 수 아래라는 평가였다. 자칫 패할 경우 정치,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 수 있었다. 반면 북한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시아지역예선에서 승승장구하며 본선에 올랐고, 월드컵 8강 신화를 이룩했다.

북한의 월드컵 8강 진출은 대한민국에는 충격이었다. 중앙정보부 소속의 양지팀이 탄생한 배경이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팀으로 묶여 한솥밥을 먹었고, 한국 축구사에 전무후무한 족적도 남겼다. 105일간 해외전지훈련으로 전력을 끌어올렸다.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 상황은 역전됐다. 대한민국이 주도권을 잡았다. 32년 만의 월드컵(1986년 멕시코) 출전으로 남북 축구의 헤게모니는 대한민국이 장악했다.

그 사이 냉전시대도 막을 내렸다. 남북 교류에도 물꼬가 트였다. 축구가 연결고리였다. 1990년 9월 19일, 낭보가 날아들었다. 남북이 베이징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친선경기를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9월 29일 남북은 공동 기자회견에서 친선경기 명칭을 '남북통일 축구경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10월 11일 오후 3시. 금단의 땅 평양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겨레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경기가 열린 능라도 5·1 경기장에는 15만명이 운집했다. 북한이 2대1로 승리했지만 승패는 중요치 않았다. 분단과 대립의 살얼음판 위에서 처절하게 각을 세운 남북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축구를 통해 남북이 하나된 순간이었다. 이산가족의 상봉도 이뤄졌다. 포철을 이끌던 이회택 감독은 한국 선수단 고문 자격으로 방북, 평양에서 꿈에 그리던 아버지와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부자(父子)'는 울음을 터트리며 힘찬 포옹으로 40년의 한을 풀었다.

남북은 평양 경기가 성공적으로 끝날 경우 북한을 초청해 정기적인 축구 교류를 가질 예정이라고 했다. 10월 23일 남북 축구는 잠실벌에서 다시 만났고, 이번에는 대한민국이 1대0으로 승리했다. 시작이었다. 이듬해에는 FIFA 20세 이하 청소년월드컵에서 남북 단일팀을 구성, 8강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남북통일 축구의 정기적인 교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2002년 9월 8일이었다. 대한민국은 한-일월드컵 4강 신화로 구름 위를 걷고 있었다. 12년 만의 남북축구는 박근혜 대통령이 당시 유럽-코리아재단 이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만남 끝에 성사됐다. 3년 뒤인 2005년 8월 14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8.15축전 남북통일축구경기'로 재회했지만 이후 10년 동안 열리지 못했다.


다시 그 문이 열린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18일부터 20일까지 북한 평양을 방문한다. 동아시안축구연맹(EAFF) 집행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EAFF는 한국과 중국, 일본이 중심이 돼 2002년 창설됐다. 북한도 초대 멤버다. 정 회장의 방북은 새로운 소통의 출발이 될 수 있다.

대한축구협회는 올초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으로 남북 축구 교류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빛을 보지 못했다. 지난달 북한의 지뢰도발로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지만, 다행히 해빙 무드가 열리면서 대화 분위기는 조성됐다. 축구협회는 남북 축구 교류도 새롭게 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남북 축구의 꽃은 역시 남자 A대표팀의 친선경기다. 축구협회는 조심스럽게 접근할 계획이다. 여자 축구와 남녀 청소년대표팀의 교류를 시작으로 남자 A대표팀의 통일축구로 확산한다는 방침이다. 동시에 경평 축구의 부활도 논의할 수 있다. 경평 축구는 1929년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조선일보가 주최한 경성(서울)과 평양의 도시대항전이다. 1회 대회는 10월 8일 휘문고보 구장에서 개최됐다. 축구가 가장 활발한 두 도시의 대결은 전 국민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민족에너지를 결집시키는 역할을 했다. 경·평전은 5년간 지속되면서 총 열아홉 차례의 경기를 가졌다. 경성이 4승7무8패로 열세였으나, 경기 내용면에서는 박빙의 승부를 펼쳐 승패를 떠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경·평전은 1935년에 중단된 후 1946년에 잠시 재개됐으나, 남북이 분단되면서 70년째 미래만을 기약하고 있다.

스포츠는 신비한 마력이 있다. 국제 대회에서 남북이 만나면 이념 갈등보다는 동족의 전류가 먼저 흐른다. 동아시안컵 여자 축구에선 남북 선수들이 함께 사진을 찍으며 뜨거운 우정을 나눴다.

정 회장의 방북에 거는 기대감이 높다. 남북 교류의 출발점이 축구가 되길 바란다. 축구를 통해 남북 교류의 장이 확대되길 기원한다.
스포츠 2팀 기자 newsme@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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