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일 드라마'는 현재까지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23일은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한국 축구와 인연을 맺은지 200일째가 되는 날이다. 지난해 9월 5일 지휘봉을 잡은 그는 한국 축구에 7년 만의 외국인 사령탑 시대를 열었다. 부임 초기에 기대와 우려가 공존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200일간 '우려' 꼬리표를 떼고 그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제로베이스에서 시작된 선수 선발, 숨은 진주를 발굴해내는 능력, 과감한 결단력, 한국 축구를 위한 쓴소리 등 슈틸리케 감독이 보여준 축구 세계는 명확했다.
|
호주아시안컵에서 슈틸리케호는 쿠웨이트와의 조별리그 2차전을 앞두고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주축 선수들의 줄감기로 비상이 걸렸다. 오만과의 1차전에서 부상으로 낙마한 이청용(크리스탈 팰리스, 당시 볼턴)을 포함해 심한 감기 몸살에 걸린 손흥민(레버쿠젠) 구자철(마인츠) 김진현(세레소 오사카) 김창수(가시와 레이솔) 등 5명의 쿠웨이트전 결장이 확정됐다. 쿠웨이트와의 경기 당일, 대표팀 분위기는 '초상집'이었다. 코칭스태프를 비롯해 선수단 몸관리를 책임지는 지원스태프는 가시방석에 앉아 아침 식사를 했다. 대표팀 관계자는 "국제대회에서 5명을 한 번에 '논 플레이어(Non-Player)'로 등록하는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스태프들이 정말 걱정을 많이 했다. 선수들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슈틸리케 감독만 여유가 넘쳤다. 평소대로 아침을 즐겼다. 이 때 열이 40도까지 오르는 등 감기 증상이 가장 심해 밤새 주치의의 관리를 받던 손흥민이 부축을 받으며 식당으로 걸어 왔다. 대표팀과 스태프 모두의 시선이 손흥민에게 쏠린 순간, 슈틸리케 감독이 입을 열었다. "헤이! 쏘니(손흥민의 애칭), 유 캔 플레이 투데이." 걸어다닐 수 있으니 경기에 출전해야 한다는 슈틸리케 감독의 농담이었다. 손흥민은 황당하다는 듯 억울한(?) 표정을 지었고, 대표팀 선수들은 모두 웃음을 지었다. 슈틸리케 감독의 말 한마디에 가라앉았던 대표팀 분위기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이를 본 장외룡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 부위원장이 혀를 내둘렀다. 장 부위원장은 "내가 보기에 슈틸리케 감독은 배짱이 대단하다. 중요한 국제대회에서 5명이 한 번에 못뛰는 상황인데 배짱이 없이는 저런 행동이 나오기 쉽지 않다"고 했다. 다행히 한국은 2차전에서 졸전을 펼쳤지만 쿠웨이트에 1대0으로 승리를 따냈다. 자칫, 쿠웨이트전에 패하고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최악의 결과를 맞았다면 세상에 공개되지 못할 비화로 남을 뻔한 이야기다.
|
|
슈틸리케 감독은 평소 말이 없다. 농담도 잘 받아주지 않는다. 오히려 '독설가'라는 게 협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아시안컵 기간 중 있던 에피소드다. 1월 말, 국내 한 정당의 국회의원이 당대표 경선 간담회에서 "당에는 슈틸리케 감독처럼 용인술이 뛰어난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해 화제가 됐다. 그러나 다같이 웃자며 말을 전한 협회 직원은 당혹스러워했다. 슈틸리케 감독의 반응은 한마디였다. "난 정치에 관심 없다." 네티즌 사이에서 화제가 된 '다산 슈틸리케' 패러디 물을 본 슈틸리케 감독의 반응도 무미건조했단다. 그러나 필요할 경우, 그는 독설도 서슴지 않는다. 7년간 카타르 클럽을 지도했던 슈틸리케 감독은 아시안컵 4강전을 앞두고 카타르방송과 인터뷰를 했다. '투자를 많이 하는 카타르축구가 성적을 내지 못하는 이유'를 묻자 슈틸리케 감독이 대답은 이랬단다. "국가가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교육 받을 수 있도록 관리해야 하는데 돈만 많을 뿐, 관리가 안된다. 어린 선수들은 영양관리와 교육이 중요한데 인스턴트 식품을 좋아하고 교육도 잘 받지 않는다. 끈기도 없다." 한 번은 협회 관계자가 유소년 축구 선수를 둔 부모들에게 해줄 조언을 슈틸리케 감독에게 요청했다. 슈틸리케 감독의 답은 "난 18세에 독일청소년 대표를 할 때도 축구로 평생 먹고 살지 몰랐다. 자신의 적성과 진로를 결정할 연령대가 사람마다 다르다. 어렸을때 너무 축구만 시키지 말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야한다"였다. 립서비스를 기대하기는 힘든 스타일이다.
|
#4. 슈틸리케는 한국 체질
3주간 스페인 휴가를 다녀온 슈틸리케 감독은 부쩍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스페인에서 감기 몸살로 제대로 쉬지를 못했단다. 그러나 지난 4일 귀국 후 그는 원기를 회복했다. 얼굴빛도 금세 좋아졌다. 주변에서 '한국 체질'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의 식생활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대표팀 관계자는 "감독님이 된장찌개과 미역국을 잘 드신다. 보통 식당에서 된장찌개를 다 같이 먹는데 개인 것처럼 옆에 놓고 혼자 다 드신다. 된장 한 뚝배기를 다 먹고 리필까지 한다"고 말했다. 한국 지휘봉을 잡은 이후 처음 접한 '한식 초보'지만 입맛은 '토종 한국인'에 뒤지지 않는다. 이 관계자는 "포크 대신 젓가락을 사용한다. 아시안컵 기간 동안에도 대표팀 선수들이 먹는 식단을 다 같이 먹었다. 다른 외국인 감독님은 식단을 따로 챙겼는데, 슈틸리케 감독님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음악 미팅'은 색다른 모습이다. 워낙 음악을 즐겨 들어 개인 컴퓨터에 저장된 음원 자료가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지원스태프가 슈틸리케 감독의 방을 찾으면 가장 먼저 하는 일도 '음악 선곡'이다. 노래를 함께 들으며 대화를 시작한다. 본 조비와 비틀즈의 노래를 좋아한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 7일 K리그 클래식 개막전이 열린 전주를 찾았다. 경기전 한 식당에 들린 슈틸리케 감독은 노래가 흘러나오자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고 한다. 식당에서 나온 노래는 비틀즈의 '헤이, 쥬드'였다.
하성룡 기자 jackiech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