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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돌아 제주로 복귀한 '잊혀진 천재' 심영성

박찬준 기자

기사입력 2015-01-15 09:43



"죽기 살기로 뛸꺼에요."

'잊혀진 천재' 심영성(28)이 제주로 돌아왔다. 챌린저스(4부리그) 소속의 포천시민구단에서 뛰며 공익근무를 마친 심영성은 친정팀으로 복귀했다. 심영성은 "2년 반 만에 제주에 다시 돌아왔다"며 "선수들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마치 새로운 팀에 온듯한 느낌이 든다. 아직 분위기가 잘 적응이 안 되지만 기존 선수들이 많이 도와주고 있어서 빨리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다. 얼른 시즌이 시작해 경기장에 모습을 보이고 싶다"고 소감을 전했다.

참으로 굴곡진 축구인생이었다. 2009년까지 심영성은 한국 축구 차세대 에이스로 불렸다. 2006년 아시아청소년대회(20세 이하)에서 5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그는 이청용(볼턴) 기성용(스완지시티) 못지 않은 스타였다. 2007년 청소년 월드컵(20세 이하)에는 에이스의 상징인 10번을 달았다. K리그 무대에서도 거침없었다. 2007년 제주로 이적해 그해 25경기 5골-1도움, 2008년 23경기 7골-3도움, 2009년 25경기 2골-1도움을 올렸다. 2009년 말에는 러시아 프로팀들의 러브콜이 쏟아졌다.

2010년 1월 10일, 그의 축구인생은 악몽으로 바뀌었다. 전지훈련 기간 귀가하기 위해 운전을 하다 나무를 들이받았다. 정신을 차리고 차에서 기어나왔는데 뭔가 이상했다. 오른 무릎에 감각이 없었다. 슬개골(무릎의 뚜껑뼈)이 수십개 조각으로 부셔졌다. 긴급 후송돼 제주 한라병원을 찾았을 때 병원 관계자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축구는 커녕 일반인으로 제대로 살아가기 힘들다." 축구 선수로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하늘도 도왔다. 당시 서귀포에서 대한선수트레이너협회 세미나가 열렸다. 무릎 분야의 대가로 꼽히는 김진구 명동 백병원 부원장이 인근에 있었다. 급히 연락이 닿아 이튿날 날이 밝자 김 부원장 손을 잡고 서울로 올라가 바로 수술을 했다. 4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다. 수십조각으로 흩어진 뼈를 붙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후 네 차례 더 수술대에 올랐다. 5개월간 병상에 누웠다. 이후 9개월간 재활에 매달렸다. 설상가상으로 재활기간 동안 암투병 중이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심영성은 이를 더 악물었다. 마침내 2011년 6월 복귀에 성공했다. 2012년 '에이스의 상징'인 10번 유니폼을 받았다. 하지만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오랜만의 복귀에 자신감도 잃었다. 2012년 강원으로 임대를 떠났다. 강원의 K리그 클래식 잔류에 일조한 심영성은 군입대를 선택했다. 포천시민구단에서 축구를 이어간 그는 예전의 활발한 몸놀림을 되찾았다. 물론 부상에서는 자유롭지 않았지만 클래식 무대에서 뛸 수 있는 몸상태를 만들었다.

친정에 돌아온 심영성의 목표는 부상없이 시즌을 보내는 것이다. 그는 "제일 중요한 것은 부상 없이 한 시즌을 마무리 하는 것"이라며 "개인적인 목표는 꾸준히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면서 20경기 정도에 출전하는 것이다. 조급한 마음을 가지면 부상을 당할 수 있기에 잘 준비해서 목표를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동료들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고 싶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심영성은 "프로 생활을 한지 10년이 넘어가고 있는데 항상 경쟁의 연속이었다"며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자신의 진가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 제주를 떠나기 전에는 다소 득점수가 부족했지만 올 시즌은 잘 준비해 득점력도 향상된 모습을 보이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다쳐있는 동안 팬분들이 격려를 많이 해주셨다. 정말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팬분들의 성원과 팀 성적을 위해 경기장에서 정말 죽기 살기로 뛸 생각이다." 그의 2015년 출사표다. 제2의 축구인생을 시작한 심영성의 선전을 기원해본다.


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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