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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말리는 그라운드,'상남자'하석주-최용수 감독의 우정과 품격

전영지 기자

기사입력 2013-07-16 08:01



"아무리 험난한 승부의 세계라고 해도 선후배간에 예의, 인간미는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13일 전남-서울전 직전 만난 최용수 서울 감독은 전날 밤 11시 '선배' 하석주 전남 감독에게 안부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안부전화'는 이내 '수다삼매경'이 됐다. K-리그 클래식 감독이란 '외롭고 높고 쓸쓸한' 자리다. 30분 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절반도 못했는데, 하 감독님 이야기만 들어주다 끊었다." 최 감독의 장난섞인 푸념속엔 애정이 묻어났다.

'한국축구의 레전드' 최용수, 하석주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골메뉴', 1998년 프랑스월드컵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최 감독은 "석주형이 볼만 잡으면 날 쳐다봤었다"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왼발의 달인' 하 감독이 받아쳤다. "프리킥 찬스때마다 최용수 김도훈 유상철, 다 나만 쳐다봤다. 공격수들의 골 욕심이 대단했다. 서로 자기쪽으로 차달라고 부탁했었다."

이날 전남은 '천적' 서울에 또다시 1대2로 패했다. 서울전 5연패다. 모두가 떠난 그라운드에서 하 감독과 최 감독이 다시 만났다. 짜릿한 역전승의 기쁨, 저릿한 역전패의 아픔을 숨긴 채 손을 맞잡았다. 서로를 위로하고 진심으로 응원했다.

이겨야 사는 경기, 치열했던 진검승부

전남은 FA컵 16강전에 베스트11을 아꼈다. 홈경기 서울전을 포기할 수 없었다. 서울전은 '승부사' 하 감독에게 줄곧 아픈 기억이었다. 지난해 처음 전남 지휘봉을 잡은 직후 홈에서 패기있게 맞선 서울전에서 0대3으로 완패했다. 올시즌 A매치 휴식기 직전 8경기 무패의 좋은 흐름 속에 맞붙은 서울 원정에서 또다시 0대3으로 졌다. 전남은 2011년 3월 3대0 승리 이후 4경기에서 한골도 넣지 못한채 4연패했다. 하 감독은 필승을 다짐했다. 서울에게도 전남전은 절박했다. '디펜딩챔피언'이 9위에 머물러 있었다. '치고 올라갈 것'이라는 세간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했다. 상위리그 도약을 위해 전남, 강원전에 사활을 걸었다.

후반 20분 전남 전현철의 선제골이 터졌다. 그러나 후반 40분, 리그 최강의 블록버스터 '서울극장'이 시작됐다. 김치우의 왼발을 앞세운 세트피스 2방에 전남이 무너졌다. 후반 40분 김치우의 프리킥 김주영의 머리를 향했다. 동점골이 터졌다. 후반 인저리타임, 전남 수비진은 또다시 똑같은 위치에서 프리킥을 허용했다. 이번엔 김치우의 왼발이 김진규를 겨냥했다. 역전골이 터졌다. 전남은 85분을 이겼지만, 마지막 5분을 지켜내지 못했다.

90분 대혈투 그리고 '상남자' 감독들의 우정


90분의 혈투는 끝났다. 전남은 10위를 유지했고, 서울은 상위리그 마지노선인 7위로 올라섰다. 원정팀 최 감독이 먼저 기자회견을 마쳤다. 평소와 달리 서울행 버스에 서둘러 오르지 않았다. 후끈한 지열이 채 가시지 않은 전남 광양구장 잔디를 나홀로 산책하듯 걸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나오던 하 감독의 시선이 그라운드 위 최 감독에게 머물렀다. "어이, 안가고 뭐해?" 팬들도 선수도 모두 떠난 그라운드엔 '연극이 끝난 후' 같은 쓸쓸함이 있었다.

"요즘 우리 선수들에게 굉장히 끈끈한 힘이 생겼어요. 나도 놀랄 정도"라며 최 감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축하한다. 역시 서울 선수들 좋더라." 하 감독이 후배에게 겸허한 축하를 건넸다. 그래도 지고는 못사는 하 감독인데, 뼈아픈 역전패가 기분 좋을 리 없다. 그런 선배의 마음을 헤아렸을까. 최 감독이 화제를 바꾸었다. 선제골을 터뜨린 전현철에 대한 찬사를 쏟아냈다. "전현철이 뒤에서 뛰어드는데 대단히 무섭더라구요. 아주대 출신이죠? 내 리스트에도 있었던 선수인데, 우리 수비수들한테 단단히 주의시켰는데 결국 못잡았어요." 하 감독은 통한의 프리킥 실점 상황을 떠올렸다. "5분 남은 상황에서 우리 지역에서 왜 그런 파울을 내주는지… 조심하라고 일렀는데도 안됐어…." 양 감독은 "어린선수들의 경험부족"에 인식을 같이 했다. "전남은 패기가 대단한 팀"이라며 "경험만 조금 더 보완되면 정말 좋은 팀이 될 것"이라는 최 감독의 위로에 하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위권 감독들도 힘들어 한다. 쉬운 게 없다. 아래는 아래대로, 위는 위대로 힘들다. 강등권, 우승권, 상위리그,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제각각 나름대로 다 힘든 이유가 있다." 승패를 떠나 '동병상련' 지도자 입장에서 경기를 복기하며, 따뜻한 덕담과 조언을 주고받았다.

"수고했다. 늦었는데 조심해서 올라가라." '선배' 하 감독이 내민 손을 '후배' 최 감독이 꼬옥 잡았다. 피말리는 순위경쟁, 이겨야 사는 K-리그 클래식에서 모처럼 엿본 '상남자' 두 감독의 우정이 따뜻했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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