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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위기다. 사상 첫 올림픽 4강의 환희가 자칫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한국 축구의 산역사 홍명보 올림픽대표팀 감독(43). 4강 진출의 환희도 잠시, 벼랑 끝에 섰다. 운명의 장난이 잔혹하다. 종착역이 한-일전이다.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 아픈 과거가 있기에 공존할 수 없다. 15일에는 광복절이 기다리고 있다. 한국도, 일본도 '숙명의 대결'이다. 한-일전에서 승리하면 영웅, 패하면 역전이 된다. 홍 감독이 칼자루를 쥐고 있다.
모든 것이 걸렸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올림픽 축구에서 메달을 목에 걸었다.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개최국 멕시코를 2대0으로 꺾었다. 일본은 44년 만에 두 번째 메달을 꿈꾸고 있다.
홍 감독은 정반대의 입장이다. 일본에 두 번째 메달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1948년 시작된 한국 축구의 올림픽 도전사는 굴곡의 역사다. 64년간 뼈 속에 남은 상처는 좌절이다. 메달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8년과 2004년 두 차례 8강에 올랐지만 4강 진출에 실패했다. 사상 세 번째 8강 문을 통과한 런던올림픽이 첫 도전이다. 선택이 없다. 이긴 자에게만 동메달이 돌아가는 외나무다리 혈투다. 홍 감독은 사상 첫 메달을 꿈꾸고 여기까지 왔다. 남은 경기는 한 경기 뿐이다.
한-일전의 희비는 분명하다. 조광래 전 A대표팀 감독은 지난해 8월 10일 일본과의 친선경기에서 0대3으로 완패하며 주저앉았다. 여론이 등을 돌렸고, 대한축구협회는 이를 빌미로 12월초 경질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지휘했던 허정무 감독은 반대의 경우다. 그 해 초 동아시아선수권 2차전에서 중국에 0대3으로 완패했다. 32년간 이어진 공한증이 무너졌다. 27경기(16승11무) 무패 신화가 깨졌다.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한 경기로 만회했다. 나흘 뒤 열린 한-일전에서 3대1로 완승하며 성난 민심을 잠재웠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의 차범근 감독도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일본과 맞닥뜨렸다. 원정에서 2대1 역전승하며 '도쿄대첩'을 완성했지만, 안방에서 0대2로 패하며 상승세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늘 그랬다. 한-일전의 결과는 치명적이다. 야속하지만 홍 감독도 그 무대에 섰다. 그는 런던올림픽을 위해 4년을 준비했다. 현재의 선수들을 이끌고 2009년 이집트 국제축구연맹 청소년월드컵(20세 이하)에 출전했다. 8강 진출의 위업을 달성했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도 전초전이었다. 진용을 23세 이하로 채울 수 있었지만 올림픽을 대비, 대부분을 21세 이하 선수들로 꾸렸다. 현재 런던올림픽을 누비는 주역들이다.
한-일전에서 그의 축구 인생이 심판을 받는다. 동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 절대지존인 거스 히딩크 감독을 넘게 된다. 히딩크 감독은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연출했다. 하지만 결승 문턱을 넘지 못했다. 독일에 0대1로 석패했다. 3-4위전에서도 터키에 2대3으로 패했다. 반면 시상대에 올라서지 못한다면 그동안 쌓아 온 공든탑이 한 번에 무너질 수 있다.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2년 전 광저우아시아게임, 홍 감독은 4강전에서 아랍에미리트를 만나 연장 혈투를 치렀지만 끝내 좌초했다. 0대1로 무릎을 꿇었다.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휘감았다. 반전은 또 있었다. 이란과의 3~4위전은 그의 시계를 다시 돌려 놓았다. 1-3으로 뒤진 후반 33분 갱없는 드라마가 연출됐다. 박주영(아스널)이 골문을 열었다. 이어 지동원(선덜랜드)이 후반 43분과 44분 릴레이 포를 작렬시키며 극적으로 역전승을 거뒀다. 11분간의 쇼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홍 감독은 선수들과 포옹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2012년 런던올림픽을 기약했다.
올림픽 최종예선에서는 A대표팀과의 중복 차출 갈등으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올림픽을 앞두고는 박주영의 병영 연기 논란이 불거졌다. "군대를 안 가면 내가 대신 가겠다"는 말로 잠재웠다. 홍정호(제주) 장현수(FC도쿄) 한국영(쇼난 벨마레)의 부상 낙마에 이어 와일드카드 정성룡(수원)과 김창수(부산)도 다쳤다.
하지만 한-일전은 한-일전이다. 눈을 돌릴 곳은 없다. 결코 패할 수도 없고, 패해서도 안되는 최후의 승부다. "이 길이 내가 걸어야 할 길이라면 피하고 싶지는 않다. 선수 시절 쌓아놓은 명예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받아들이겠다." 2005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설 때 홍 감독의 출사표였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