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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 이 선생의 얼이 깃들어있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1만3000여 명의 읍민들이 모여사는 작은 촌락이 4일 시끌시끌했다.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K-리그 감독들과 스타 선수들이 등장했다. 다들 빨간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목에는 약속이나한 듯 하얀 수건이 걸여 있었다. 축구화를 신고 축구공을 차는 대신 집안에서 짐들을 빼고 벽에 도배질을 했다. 이들이 맞춰입은 하얀 티셔츠에는 'K-리그와 함께하는 사랑의 집고치기'라는 문구가 큼지막히 붙어져 있었다.
운동보다 더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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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수리가 시작됐다. 짐들 가운데 버릴 것과 쓰는 것을 구분했다. 최 감독이 진두지휘에 나섰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 짐나르기 하나 만큼은 자신있다고 했다. 최 감독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오래된 장롱과 전축을 끄집어냈다. 전축은 선들이 꼬일대로 꼬여있었다. 20년 이상 쓰던 거라고 했다. 오래된 냉장고도 옮겼다. 김병지는 "운동보다 더 힘들다. 지난번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오지 말고 어린 막내들 보낼 건데 잘못했다"라며 엄살을 부렸다. 그러면서도 제일 열심히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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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가 제일 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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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안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인원이 모여 있었다. 김호곤 울산 감독을 필두로 이흥실 전북 감독 김봉길 인천 감독 황선홍 포항 감독이 있었다. 감독들을 따라온 이 용(울산) 김상식(전북) 정인환(인천) 신형민(포항)도 자리했다. 일반팬 5명도 동참했다. 이미 짐은 다 끄집어낸 상태였다. 도배가 한창이었다. 선수들이 풀칠에 나섰다. 이내 퇴짜를 맞았다. 무릎 부상을 달고다닌 선수들이라 오랫동안 쪼그려 앉아있지 못했다. 무릎에 무리가 갈 수 있었다. 팬들이 붓을 잡았다. 8자 모양으로 붓칠을 했다. 그 사이 선수들은 집안 곳곳 청소에 나섰다.
감독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막내 황선홍 감독이 나섰다. 풀칠이 다 된 도배지를 들었다. 김상식과 신형민을 조수로 황 감독을 도왔다. 하지만 이내 실수를 연발했다. 다른 방에서 작업을 마치고 온 도배사가 오더니 "거기 붙이는 거 아닌데"라고 꼬집었다. 황 감독의 얼굴은 빨개졌다. 스타일은 구긴 황 감독은 심기일전해 다시 도배질에 나섰다. 점심 식사를 하러 가자는 말도 들은체 만체였다. "창문에 남아있는 부분을 다 붙이고 가겠다"는 프로정신을 보여주었다. 남들보다 다소 늦게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도 "마무리를 지으니 기분이 좋다.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그래도 축구가 제일 쉽다"고 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김호곤 감독은 "우리팀 선수들과도 시간을 내서 이런 일을 해야겠다. 지역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작업이다"고 했다.
최악의 집에는 박경훈 제주 감독과 모아시르 대구 감독 등이 배치됐다. 여기에는 안기헌 연맹 사무총장도 있었다.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화장실 청소에서부터 집기류까지 쓸만한 것이 많지 않았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청소에 나섰다. 모아시르 감독은 "한국에 이런 집이 있는 줄 몰랐다.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돕고 싶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난 뒤에도 봉사활동은 이어졌다. 집들 고치기는 물론이고 일일 축구클리닉도 열었다. 천현초등학교 인조잔디구장에서 파주 율곡중 축구부 29명을 대상으로 했다. 박경훈 제주 감독이 지도자로 나섰다. 김병지와 김상식 유경렬(대구) 김형범(대전) 등이 함께 했다. 중학교 선수들은 프로 선수들이 보여주는 화려한 기술에 감탄했다. 축구로 하나가 된 하루였다.
파주=이 건 기자 bbadagu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