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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의 미소년은 32세가 됐다. 최고참이다. 다섯 번째 월드컵이 기다리고 있다.
13년동안 환희를 꿈꾸고 또 꿨다. 꽃을 피우지 못했다.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었다. 2011년 10월, 이동국(전북)이 태극마크와 이별을 할 때가 왔다.
기대가 컸다. 한국 축구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일찍 터트린 축포는 곧 빛을 잃었다. 비운의 드라마가 시작됐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게으른 천재'로 낙인찍혀 고배를 마셨다. 월드컵 승선을 위해 발버둥쳤다. 부상까지 숨긴 채 훈련에 나섰다. 히딩크 감독도 끝까지 미련을 뒀다. 무리한 몸 관리는 화근이 돼 돌아왔고, 결국 낙마했다. 이후 한동안 술로 세월을 보냈다.
절치부심, 4년을 기다렸다. 2006년 독일월드컵이었다. 아픈만큼 성숙해져 있었다. 골감각이 절정에 달했다. 당시 한국을 이끈 딕 아드보카트 감독은 최고의 타깃맨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월드컵 출전이 기정사실화 됐다. 하지만 월드컵을 불과 60여일 앞두고 K-리그 경기 도중 부상으로 쓰러졌다. "10%의 가능성만 있어도 재활하겠다." 현실이 되지 않았다. 수술대에 올랐다. 오른무릎 전방십자인대 수술로 날개를 접었다. 20대가 훌쩍 흘러갔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또 기회를 잡았다. 햄스트링 부상으로 우여곡절 끝에 최종엔트리에 승선했다. 조커였다. 우루과이와의 16강전 후반 16분 교체 투입됐다. "독을 품고 있다고 생각해 이동국을 기용했다." 허정무 전 A대표팀 감독의 말이다. 돌아온 것은 또 상처였다. 후반 41분 운명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박지성(맨유)의 기막힌 스루패스를 받은 그의 앞에는 상대 골키퍼 뿐이었다. 골망을 흔들면 2-2 동점이 되는 순간이었다. 극적인 반전은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월드컵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숙였다.
지난해 7월 조광래 감독이 A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이동국은 내 축구 색깔과는 맞지 않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예선이 또 시작됐다. 변화가 일어났다. 조 감독은 정점의 골결정력과 문전에서의 세밀한 움직임에 생각을 고쳤다. 15개월 만에 그를 첫 발탁했다. "나이가 들어도 경기력이 떨어지지 않고 몸 관리만 잘하면 충분히 브라질월드컵까지 내다볼 수 있다." 이상은 컸다.
하지만 악연의 역사는 재현됐다. 7일 폴란드전에서 전반 45분 출전에 그쳤다. 11일 아랍에미리트(UAE)와의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예선 3차전에 후반 34분 교체 투입됐다. 주어진 시간은 10분 남짓 이었다. 시간이 짧았다. 그는 말문을 닫았다.
이동국은 A매치 83경기에 출전, 24골을 터트렸다. 공식 A매치로 인정받지 않은 경기를 포함하면 기록은 86경기, 25골이다. 이동국의 태극마크, 환희보다 눈물이 먼저 떠오른다. 마침표가 눈앞에 다가왔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