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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백지은 기자] '한국 블루스 음악의 선구자'인 가수 박광수가 별세했다.
당시 박광수는 블루스를 노래하는 유일한 가수로 흑인 병사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단 1년만에 동양방송 '쇼쇼쇼'라는 빅쇼 무대로 진출했다. 이후 1968년 영사운드, 1970년 김상희의 스페셜쇼, 1971년 록그룹 비 블루와 영 에이스를 거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의 소문을 접한 신중현은 찾아와 팀 결성을 제안했고, 박광수는 최고의 그룹이었던 신중현 밴드 더 맨의 리드보컬이 됐다.
그러나 행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첫 음반 '장현과 더맨'이 발매된 1972년 유신정권이 시작되며 더맨은 소위 말하는 '관리대상'이 됐다. 신중현이 청와대 청탁을 거절한 뒤 멤버 모두 통제와 장발 단속으로 시달렸다. 이에 박광수는 항의의 표시로 삭발을 한채 쇼프로에 출연했고, 태극기 휘날리는 장면을 현란한 조명으로 조롱하며 감행한 '아름다운 강산' 연주 시위가 화제를 모으면서 '장현과 더맨'은 퇴폐음반으로 몰려 금지됐다. 또 박광수가 가장 좋아했던 수록곡 '잔디'는 곡명인 '잔디'가 '대마초'를 뜻하는 경상도 은어라는 이유로 대마초 파동에 휘말렸다.
그러나 박광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2007년 '박광수 2007 아름다운 날들'을 발표하고 활동을 재개했다. "음악인에게 은퇴란 없다. 무대에서 공연하다 죽는 것이 꿈"이라는 게 고인의 소신이었다.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는 고인에 대해 "우리나라 초창기 R&B 가수로 미8군쇼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 1960년대에 정통 R&B를 소화했으며 여러가지 리듬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우리나라 미8군쇼와 그룹사운드 1세대 모임 예우회 회원으로 우리나라 록 음악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평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금천구 쉴낙원 VIP2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0일 오전 10시.
백지은 기자 silk781220@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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