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종합]"배우로 살아 행복해"…'69세' 예수정, 나이듦의 의미와 42년 연기인생

이승미 기자

기사입력 2020-08-18 17:35


[스포츠조선 이승미 기자]"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고, 자신이 짊어진 인생은 자신이 살아가는 것. 그게 진짜 어른이 모습이 아닐까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69세 효정이 부당함을 참지 않고 햇빛으로 걸어나가 참으로 살아가는 결심의 과정을 그린 영화 '69세'(임선애 감독, ㈜기린제작사 제작). 극중 69세의 성폭행 피해자 심효정 역의 예수정(65)이 18일 서울 강남구에서 진행된 라운드 인터뷰에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연극 무대를 거쳐 영화 '침입자', '신과 함께-죄와 벌', '허스토리', tvN 드라마 '비밀의 숲',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등의 작품에서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며 빛나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연기 인생 42년차 명품 배우 예수정. 그가 한국 영화에서 단 한번도 다루지 않았던 노년 여성의 성폭행 사건을 다룬 영화 '69세'를 통해 관객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깊은 화두를 던진다.

극중 그가 연기하는 효정은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옷을 차려 입고 늘 정갈한 자세를 유지하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노인답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살고 있는 69세 노인. 어느 날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29세의 젊은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치욕적인 일을 당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하지만 경찰과 주변 사람들은 효정을 치매 환자로 매도하고 법원 역시 나이 차이를 근거로 사건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하자 효정은 현실에 굴하지 않기 위해 용기를 내어 가해자를 향한 일갈을 준비한다.
이날 예수정은 '노년 성폭행'이라는 생소한 소재에 대해 "처음 소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 또한 '진짜 이런 일이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작가가 글을 썼을 때는 어느 정도 실화를 듣고 쓰지 않았을까 싶어서 작가에게 '픽션 아니죠?'라고 물으니 아니나 다를까 신문기사에서 본 실화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이어 "신문기사를 통해 본 사건인데, 우리나라는 아니고 해외에서 이런 성폭행 사건을 봤다고 하시더라. 진짜 피해자분은 효정과 달리 자살을 했다고 하더라. 여러 곳에 신고를 했는데 영화의 상황처럼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서 안타깝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더라. 감독님께서 이 사건이 머리 속에 떠나지 않아서 글을 썼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안타까운 선택을 했던 실화 속 피해자와 달리 꿋꿋이 자신의 일을 거러나가는 효정의 모습을 통해 노년의 존엄성을 보여주는 '69세'. 예수정은 "모두가 개인적인 삶을 살아도, 모두가 사회적인 인물을 느끼지 않나. 극중 효정의 곁에는 기주봉 선생님이 연기하신 동인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존재가 효정에게는 정말 중요했던 것 같다"라며 "효정 역시 오롯이 혼자 였다면 피해를 당한 후에도 그렇게 용기 있게 입을 열지 못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동인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친구든 가족이든 다른 존재와의 연대감은 중요한 것 같다. 사람으로서 한발을 내딛을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어서 "그리고 또한 효정이 강인한 삶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는 큰 축에는 어렸을 때부터 떨어져 살고 있는 딸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움에 대한 힘은 인생에 있어서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 큰 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과 관련되 효정의 구질구질한 과거가 나오지 않는게 이 영화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늘 사회적인 메시지를 이야기하는 작품을 선호한다는 예수정은 "사회적 이야기를 하는 작품을 좋아한다. 사실 저는 평상시에 굉장히 개인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뭘 사회적으로 해나가기 보다는 그냥 내눈 앞에 떨어진 내 머리카락이나 제대로 줍자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작품으로나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나는 모두가 개인적으로 자신을 잘 챙겼으면 좋겠다. 괜히 광화문 나가서 문제 일으키지 말고 우리의 소중한 태극기를 광장에서 모여서 누덕질 하지 말고 그냥 눈 앞에 자신이 떨어뜨린 머리카락이나 제대로 줍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목사 성직자라면 광화문에서 허튼 일을 하는게 아니라 성경 말씀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며 현 시국에 대한 뼈 있는 말을 덧붙였다.

예수정은 노년 여성의 성폭행을 다루는 영화 '69세'는 단지 소재가 전부인 작품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극적인 소재만이 전부인 영화였다면 택하지 않았을 것 같다. 이 작품에서 성폭행은 소재일 뿐이고, 이 영화는 사회적 취약성에 있는 인물이 끔찍한 일을 당했을때, 그 힘겨운 삶을 어떻게 걸어가는가에 대해 묵묵히 보여주는 영화다"고 강조했다. 이어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사회가 취약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90% 이상이 편견이 시선을 감내하는 인물의 대처가 흥미를 끌었던 작품이다"고 덧붙였다.


예수정은 "극중 노년의 힘없는 여성인 효정이 평상시보다 힘든 일을 당했을 때 대처하는 모습을 영화가 잘 다룬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끔찍한 일을 당했을 때 이 여성이 뭔가 거창하게 부르짖는게 아니라, 자기가 직면한 자기의 문제를 묵묵히 맞서고, 자기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어깨에 매고 참 좋았다"라며 "나는 효정이 나의 삶에서 덮쳐왔던 일들을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책임지고 눈 감지 않고 대면한다는 게 참 좋았다. 그래서 이 인물이 마지막에는 결국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건이 시원하게 해결되고 그런건 아니지만, 효정이 어떠한 속박에서 벗어다는 게 바로 선물을 받은거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예수정은 '69세'가 노년을 집단이 아니라 개개인의 삶으로 바라보는 게 좋았다며 "그동안 여러 작품에서 그려졌던 노년의 삶이라는 건, 위안부처럼 하나의 집단이나 젊은 이들이 생각하는 노년의 삶으로 표현되고 희화화됐던 것 같다. 일반적이지 않은 집단으로 표현됐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사건 자체는 특수하지만 삶을 걸어나가는 모습은 상당히 일반적인 노년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감독님이 노년의 일반적인 삶을 깊게 탐구한 느낌이 든다. 우리 모두의 미래의 모습을 집단으로 뭉뚱그리는게 아니라 개개인으로 바라본다는 게 참 좋았다. 노령사회가 다가올수록 그런 삶의 모습이 더 개개인으로 그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예수정은 노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다룬 영화 '69세'가 가진 의미에 대해 "앞으로 나올 이 같은 영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작점으로서는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어 "노년이라는게 우리가 갈 길인데, 그동안 영화 속 노년의 모습은 일반적이지 않게 그려졌다. 그래서 그동안 작품은 노년의 삶에 대해 젊은 이들에게 두려움을 줬을 것 같다. 마치 노년이 되면 우리가 없어지는 느낌을 주고, 몇몇 인물들을 통해 50대가 넘으면서 성숙은 없어지고 딴 나라에서 이상한 인물이 된다는 인식을 심어줬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가 생각하는 어른의 개념은 딱 두 가지다. 첫번째 가능한 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사는 것. 두번째는 내 삶은 내가 책임지며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는 여력이 있다면 더 많은 사람을 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예수정은 '69세'에서 다른 작품들에서 보여줬던 '일반적인 성폭형 피해 여성의 프로토콜 타입'을 벗어난 피해자를 연기한 것에 대해 "우리가 노인들은 성이 없을거라고 잊고 살지만 69세의 여성에게도 성이란 게 있다. 사랑이 없는 성행위가 이뤄졌다는 건, 그리고 당한 자는 해한 자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는 것, 예를 들어 돈을 받거나 지위를 얻기 위하는 것에 대한 의도가 전혀 없이 당한 것을 성폭행으로 볼 때, 69세 효정은 여성으로서는 가장 수치스러운 일을 당한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효정은 여성으로 당연히 자신이 당한 일을 입밖으로 꺼내기 망설여지고 69세의 사회 취약자로서 굳이 내가 나서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야 하나 생각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효정은 용기를 나갔다. 패배가 확실한 전쟁에 나가는 군인의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천만영화와 인기 드라마에 출연하며 적은 분량에도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준 예수정은 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일단 난 작품 운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이어 "내 또래의 어떤 여성 배우든 작품 속에서 그냥 기능적인 엄마 역할만 하고 싶겠나. 나는 운이 좋았던 것"이라며 "아주 일상적인 역할이지만, 엄마들도 사유의 모습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요즘의 감독님들은 예전 감독님과 달리 주인공을 위한 병풍 같은 엄마를 찾는게 아니라, 적은 분량의 인물이라도 그 인물의 사유를 바라봐주는 감독님이 있다. 그건 전적으로 감독님들의 역량이라고 생각한다"며 웃었다.
연기 인생 42년차를 맞이한 예수정은 "내게 배우는 최고의 직업이다. 배우로사는게 너무 행복하다"라며 웃었다. 운동 선수에 대한 꿈을 꾼 적도 있다는 그는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축구선수를 했을 것 같고, 젊었을 때는 농구선수를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내게 최고의 직업은 배우다"고 전했다. 이어 " 나는 늘 삶을 즐기는 타입으로 살아서 생활 방식은 아직 중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연기를 하지 않았다면 내 삶을 깊이있게 들여다보지 못햇을 것 같다. 하지만 연기를 하고 여러 작품을 만나면서 나는 삶과 인생을 들여다 보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한편, '69세'는 '사바하', '남한산성', '화차' 등 수십 편의 장편 영화에 참여한 스토리보드 작가 출신의 임선애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다. 예수정, 기주봉, 김준경, 김중기, 김태훈 등이 출연한다. 오는 20일 개봉.

이승미 기자 smlee0326@sportshcosun.com 사진 제공=(주)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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