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연대기', 오랜만에 만난 웰메이드 범죄 스릴러

김표향 기자

기사입력 2015-05-07 08:17



서울의 강남 한복판, 고공 크레인에 칼에 찔린 시체가 목 매달려 있다. 시체가 응시하고 있는 곳은 강남경찰서. 죽음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한 시체를 마주한 베테랑 형사 최창식(손현주)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린다.

지난 밤, 동료들과의 회식을 마친 최창식을 태운 택시가 인적이 드문 산길로 들어선다. 택시기사는 난데없이 칼을 들고 달려들고 최창식은 격투 끝에 우발적으로 그를 죽이게 된다. 범행 흔적을 모두 지우고 황급히 자리를 떠난 최창식 앞에 다음날 다시 나타난 시체. 대한민국을 뒤흔든 기이한 살인사건의 수사 책임자가 된 최창식은 사건의 단서들을 감추기 위해 또 다시 주요 용의자를 죽인다. 악행을 감추기 위해 더 큰 악행을 저지르는 '악의 뫼비우스'가 최창식을 옭아매기 시작하고, 점차 그 뒤에 도사리고 있던 '악의 연대기'가 드러난다.

영화 '악의 연대기'는 범죄 스릴러의 공식을 충실히 따라간다. 사건의 배후에 있는 진짜 범인은 누구이며 왜 그가 최창식을 죽이려 하는지를 미스터리로 던져놓고, 범죄사건에 휘말린 최창식의 심리에 집중해 그의 행적을 훑는다. 최창식은 수사팀 동료들이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사건의 단서들을 은폐하는 동시에 사건의 진범을 추적해 간다.

용의 선상에 오른 시체운반책이 최창식에 의해 죽음을 맞으면서 사건은 수습 국면에 들어가지만, 그 순간 진범임을 자처하는 김진규(최다니엘)의 등장으로 사건은 다시 혼돈 속에 빠져든다. 김진규의 계산된 행동은 누군가를 죽이지 않을 수 없는 딜레마 속으로 최창식을 몰아넣는다. 김진규의 등장으로 사건은 미스터리식 전개에서 최창식과 김진규의 심리싸움으로 전환된다.

거대한 반전이 드러나기까지 영화는 숨 돌릴 틈 없이 관객을 긴장감 속으로 몰아넣는다. 최창식이 휘말린 사건 자체가 치밀하게 설계된 것은 아니지만, 최창식의 심리에 온전히 집중해 매듭을 풀어가기 때문에 기대 이상으로 몰입도가 높다. 여느 범죄 스릴러 영화처럼 반전에만 기대지 않고 오히려 반전의 단서들을 은폐한 것은 꽤나 현명한 전략으로 보인다. 또한 잔혹한 장면이나 리얼한 격투신이 많지 않음에도 스릴러의 쾌감이 상당한데, 최창식의 표정과 핏발 선 눈빛, 심장을 두드리는 배경음악 덕분이다.

특히 주연배우들의 연기는 압권이다. 손현주는 눈빛과 얼굴 근육의 미세한 떨림만으로도 최창식의 복잡한 감정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두려움에 떨던 눈빛이 살기를 띄기 시작하면 저절로 숨을 죽이게 된다. 백운학 감독은 "손현주의 시선이나 표정을 놓치고 싶지 않은데 극의 전개상 어쩔 수 없이 편집으로 잘라내야 할 때 무척 힘들었다. 감독판이 만들어진다면 손현주의 연기만 죽 이어놓고 보고 싶다"고 했다. 마동석의 안정감 있는 연기, 최다니엘의 광기 어린 연기, 박서준의 침착한 연기도 극을 탄탄하게 뒷받침한다. 배우들의 연기가 오랜만에 잘 만든 한국형 범죄스릴러 영화를 빚어냈다.

영화 초반부, 최창식은 신출내기 형사 차동재(박서준)에게 인간의 '우발적 본능'으로 인해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한다. 이 말은 영화 후반부에 다시 최창식에게로 비수가 되어 되돌아온다. 두고두고 곱씹게 되는 장면이다. 오는 14일 개봉.
김표향 기자 suzak@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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