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후한 멋을 풍기는 은백색 긴 머리,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작은 귀고리,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큰 키와 체격.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친숙한 피아니스트 박종훈의 모습은 이러하다. 그가 점잖은 슈트와 검은색 짧은 머리 안에 자신을 슬그머니 감추고 드라마에 등장했을 때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 사람이 꽤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화면 속 그 남자가 박종훈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마치 건반 위의 손가락이 음표 사이를 유영하듯,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사를 '연주'하고 있었다.
박종훈은 연기를 하는 듯, 안 하는 듯, 자연스럽게 극에 녹아들었다. 정성주 작가가 조인서 캐릭터에 박종훈의 실제 모습을 반영한 것도 도움이 됐다. '밀회'에 함께 출연한 김창완처럼 음악과 연기를 병행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제2의 김창완'이라고 치켜세우니,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김창완 씨는 제가 너무나 존경하는 분이에요. 수십년 동안 연기를 해온 분 앞에서 감히 제가 어떻게…. 저를 잘 모르는 누군가가 그러더라고요. 저 배우, 피아노 연기 잘한다고. (웃음)"
박종훈이 경험한 연기는 음악과 많이 닮아 있었다. 표현 수단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예술 분야이기 때문에 상통하는 점이 많더라고 했다. "예술은 혼자 느끼는 게 아니라 보고 듣는 사람에게 전달이 돼야 의미가 있어요. 그 방법이 무엇이든 예술가는 감성을 표현하는 사람이니까. 특히 무대 예술인 무용과 음악과 연기는 너무나 비슷해요." 그런 의미에서 음악의 흐름에 배우의 표정과 몸짓이 완벽하게 부합하는 '밀회'의 디테일에 전문가인 박종훈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박종훈은 극 중 유아인이 연주해 화제가 된 '작은별 변주곡'을 직접 작곡했다. 선재 캐릭터에서 영감을 얻어 10분 만에 구상을 끝내고 바로 오선지에 음표를 옮겼다. 박종훈의 음악과 연기는 이렇게 교감했다.
박종훈에게선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편견 없이 유연했고, 음악이라면 무엇이든 여유롭게 포용했다. 클래식 프로그램 진행자, 라디오 DJ, 음반 제작자, 작곡가, 그리고 연기자까지 다채로운 변신이 가능했던 것도 그래서일 테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일은 역시 무대에서 관객과 소통하는 일이다. "무대에 서는 건 중독 같아요. 절대 포기할 수 없죠. 사실 공연이 다가오면 하기 싫은 마음이 생기기도 하는데, 막상 끝나면 다음 공연을 기다리게 돼요. 무대에서 연주할 때, 그리고 곡을 쓸 때, 가장 몰입하고 희열을 느낍니다."
다시 피아노 앞으로 돌아온 박종훈. 벌써부터 수많은 무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11월엔 독주회도 예정돼 있다. 지난 몇 달간 드라마를 통해 그의 연주를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이젠 그의 연주를 들어야 할 시간이다. 피아니스트는 역시 피아노와 마주 앉은 옆 모습이 훨씬 매력적이다.
김표향 기자 suza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