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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이젠 한번 웃고 스쳐만 가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예능 프로가 큰 일을 해내는 시대. '재미+의미'의 결합 상품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선택 2014'는 실제 선거 과정과 똑같이 진행되고 있다. 이번 6·4 지방선거에선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투표일 닷새 전 전국 어디서나 먼저 투표할 수 있는 사전투표제가 전국 단위로는 처음 실시된다. '무한도전'도 지난 17일과 18일 이틀간 전국 10개 도시 11개 투표소(서울 2곳)에서 사전투표를 실시했다. 투표 시간도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실제 선거와 똑같았다.
반응은 폭발적이다. 이틀간 총 8만 3000여명의 시청자들이 투표에 참여했다. 투표 첫날인 17일에는 3만 4000여명, 18일에는 무려 4만 8000여명이 투표소를 다녀갔다. 생후 4개월 아기부터 89세 할머니까지 연령도 다양했고, 대만과 중국 등 외국인 유권자의 참여도 눈에 띄었다. 재선에 도전하는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와 이본수 인천시교육감 후보도 투표소를 찾았다.
최종 후보에 오른 멤버는 유재석, 정형돈, 노홍철. 여섯 멤버가 출마했지만 합종연횡 끝에 단일화를 하면서 셋으로 좁혀졌다. 그 과정에서 공약은 사라지고 후보만 남았다. 정책 선거를 부르짖지만 늘 인물 선거로 끝나는 실제 선거와 흡사하다. 시사평론가 정관용이 진행한 TV토론회도 현실을 많이 닮았다. 상대 후보에 대한 정치공세와 인신공격으로 난장판이 됐다. 대쪽 같은 정관용조차 후보들의 막말 공세를 말릴 수 없었다. 매년 선거철마다 되풀이됐던 장면.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 웃프기만 하다.
날카로운 정치 풍자와 패러디. '무한도전'의 특기이자 장기다. 박명수는 유재석을 겨냥하며 '당신을 떨어뜨리려 나왔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지난 대선을 연상시킨다. 또한 자기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하는 박명수 특유의 '빠져나가기 화법'엔 '유체이탈 화법'이란 자막도 붙었다. '유체이탈 화법'은 세월호 참사의 책임자를 엄벌하겠다면서 심판자를 자처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을 네티즌들이 풍자한 표현이다. 정형돈의 공약인 '시청률 재난 콘트롤타워 설치'도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정부의 무능과 늑장대처를 꼬집었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이번 선거 특집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지 정치 풍자가 선사하는 카타르시스 때문만은 아니다. '위기'와 '변화'에 대한 '무한도전'의 철학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리더 격인 유재석이 '무한도전'의 현주소를 진단하며 했던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우리가 시청률 꼴찌를 여러 번 했다. 그래서 위기라는 말이 나온다. 물론 시청률이 떨어지면 위기다. 그런데 진짜 위기는 우리가 위기인지 모르는 것이다. 또한 위기인 것을 알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진짜 위기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시청률이 돼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목표는 웃음이 돼야 한다." '위기일수록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평범한 사실. 세월호 정국과 맞물려 신뢰가 땅으로 떨어진 관료와 정치인과는 대척점에 선 자기 반성과 진정성에 시청자들은 무의식적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무한도전'의 선거 특집은 실제 6·4 지방선거 투표율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까. 네티즌 사이에선 집권여당이 '무한도전'을 불편해할 거란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투표율이 높으면 야당에 유리하다는 게 정설. 전체 투표율에 영향을 미치는 젊은층의 투표율이 '무한도전'으로 인해 높아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전통적으로 투표 독려는 예능과는 동떨어진 영역이었다. 하지만 '무한도전'이 과감하게 영역을 넓히고 나왔다. 선거가 웃음의 소재가 되면서 현실 정치 참여의 벽이 낮아졌다는 사실을 실감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무한도전'으로 대변되는 예능 프로그램의 '무한확장'. 그 끝은 과연 어디일까.
김표향 기자 suza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