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제작이 콘텐츠 생산이라면, 배급은 유통이다. 콘텐츠가 나쁘면 아무리 날고뛰는 전문가가 붙어도 소용없다. 그러나 영화 자체가 잘 나왔을 경우, 날개를 달아주는게 바로 배급이다. 특히 스타 마케팅에 기댈 수 없는 작은 영화나 저예산 영화의 경우 더더욱이 그렇다.
|
요즘 극장가에서 최고 화제는 뭐니뭐니해도 '숨바꼭질'이다. "영화가 좋다좋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터질 줄이야"라는 반응이 절로 나온다. 제작비는 25억원. 같이 붙었던 100억원 '감기'에 비하면 저예산(?) 영화다. 손현주 문정희 전미선 등 모두 대단한 연기파들이지만 스타 파워를 기대하긴 힘들다. 그런데 뚜껑을 열자마자 신기록을 쏟아내면서 500만 관객을 가뿐히 넘겼다.
4월 촬영을 마친 '숨바꼭질'은 원래 가을 개봉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투자배급사인 뉴(NEW) 관계자들은 영화 가편집본을 본 뒤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이미 지난해말 '7번방의 선물'을 연말 전진배치하는 '신의 한 수'를 발휘했던 뉴 측은 이번엔 '숨바꼭질'의 개봉을 확 앞당겼다. "시나리오보다 훨씬 더 잘나왔다. 여름에 대작이 많지만 스릴러적 개성이 강한 웰메이드 영화라 충분히 차별성을 만들어내면서 승부를 걸만 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뉴의 한 관계자는 전했다.
개봉관수도 대거 조정했다. 처음엔 장르 영화에 맞는 400개 관을 고민했는데, 일반 시사회 반응까지 상당히 좋은 것을 보고 스크린을 더 잡았다. 같은날인 14일 671개 관에서 개봉된 블록버스터 '감기'와 충분히 맞짱을 뜰만한 스크린을 확보하면서, 흥행 레이스를 본격 시작했던 것.
|
한편 올해 극장가 이변에 가까운 화제작 중 하나인 '은밀하게 위대하게'도 개봉 시기나 사이즈에 있어 '신의 한 수'로 평가받을 만한 작품으로 통한다. 지난 6월 5일 개봉된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첫주 1000개가 넘는 스크린을 잡으면서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흥행대작들이 노리는 초와이드 개봉을 선택했기 때문.
당시 "과욕 아니냐"는 대부분 관계자들의 회의어린 시선을 비웃듯, '은밀하게 위대하게' 또한 엄청난 흥행 성적을 연신 쏟아냈다. 이러한 성공 뒤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본격 성수기가 시작되기 전인 6월 초로 개봉을 절묘하게 잡은 점이 큰 몫을 했다는 지적. 더불어 김수현이란 스타파워를 최대한 뽑아먹을 수 있도록 와이드 개봉을 통해 초기 관객수를 최대로 긁어모았기 때문이라고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
'개싸라기'는 개봉주보다 2주차에 더 많이 관객이 드는 현상을 일컫는 영화계 은어다. 과거 단관 개봉하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엔 이 '개싸라기 신화'가 종종 만들어지곤 했다. 1993년 '서편제' 개봉 당시 일화는 영화인들 사이에 '개싸라기 전설'로 오랫동안 회자되곤 했다. 첫 주 그다지 성적이 좋지 않았던 '서편제'가 언론 호평에 힘입어 관객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개봉관이었던 단성사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모습이 9시 뉴스를 장식하면서 '서편제'는 순식간에 '국민영화'로 떠올랐다.
그러나 요즘엔 이렇게 평화롭게(?) 입소문이 나기를 기다리다가는 큰 코 다친다. 아무리 영화가 좋아도 극장 상황이 받쳐주지 않으면 입소문이 나기도 전에 극장에서 온갖 불이익을 당한다. 메인 투자배급사를 등에 업지 못한 영화일 수록 이 서러움은 더 심하다. 그리고 조용히 막을 내리게 된다.
따라서 배급 시기를 놓고 관계자들은 여러 변수를 따지고, 고민을 해야 한다. 하루가 다르게 극장 상황이 달라지므로 과거 관행이나 데이터에 기댈 수도 없다.
투자배급 관련 일을 10여년간 해온 한 중견 영화인은 "이전엔 와이드 개봉을 하려면 필름값이 만만치 않았는데, 많은 극장이 디지털화되면서 배급 비용이 현격히 줄어들었다"며 "따라서 배급업자들은 흥행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작품의 경우 최소 500개 이상 스크린 수는 확보하려 한다. 그리고 유료 시사회를 공격적으로 마련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입소문을 초반에 내도록 노력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산고의 고통을 제대로 느끼게 된다. "성수기나 와이드 개봉이 어느정도 흥행을 보장해주던 과거 공식이 깨지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때로는 감에 의존하면서 치열한 내부 논의를 거쳐 그 시기와 규모를 결정하게 된다"고 말했다.
|
과거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서 최고의 개봉시기는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과 추석이었다. 여름 방학 시즌은 전통적으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기승을 부리는 어려운 시기. 설과 추석은 장기 연휴로 이어질 경우 흥행은 이미 떼 놓은 당상이고, 보통 다섯편의 한국영화가 걸리면 1등은 물론이거니와 2등까지도 흥행 재미를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다음이 할리우드 대작들과 경쟁을 하긴 해야 하지만 겨울방학이나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시기다. 특히 겨울엔 크리스마스 시즌이 겹치는 시기에 극장을 잡는데 성공하면 그야말로 흥행 성공을 위한 첫걸음을 뗀 셈이 된다.
그러나 "요즘엔 이 모든 원칙이 깨진지 오래"라고 관계자들은 한 목소리를 낸다. 물론 기본 관객들이 몰리는 성수기의 메리트가 존재하긴 하지만, 과거처럼 '시작부터 성공을 보장받았다'고 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현격히 낮아졌다.
지난 2011년 추석을 노리고 개봉된 한국영화는 모두 참패했다. '푸른소금' '통증' '챔프''가문의 수난'이 추석 덕을 별로 보지 못했다. 먼저 개봉된 '최종병기 활'에 처절히 밀렸던 것.
2012년에도 이런 현상은 이어져 추석 개봉작인 '간첩'은 저조한 흥행 성적을 거둔 반면, 한달 먼저 개봉된 '광해'가 추석 시즌을 접수했다. 올해 설 시즌 또한 해를 넘겨온 '7번방의 선물' 이 흥행 1위에 올랐다. 이렇게 뒷심이 무섭게 붙는 영화들과 붙는 영화들은 체면치레를 할 틈도 없이 극장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올 추석 시즌엔 어떤 결과가 나올까. '숨바꼭질' '스파이' '관상' 등이 붙게 된다. 여기서 관전 포인트는 오히려 '관상'이 아닌, '숨바꼭질'의 지구력과 '스파이'의 반전 파워다.
이중 '관상'은 대박이 안나면 오히려 이상할 영화. '우아한 세계'의 한재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송강호 이정재 조정석 김혜수 등 톱스타들이 포진해있다. 여기에 요즘 최고 핫스타인 이종석까지 이름을 올려놨다.
그렇다고 방심은 금물이다. '숨바꼭질'은 요즘도 점유율 40%를 거뜬히 넘긴다. '스파이' 또한 촬영 초반 감독까지 교체하는 등 잡음이 끊이지 않으면서 과연 제대로 개봉이나 할 수 있을까 회의적인 시선을 받았던 영화인데 시사회 직후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관상'을 살짝 피해, 한 주 앞선 5일 개봉을 선택한 듯한 '스파이'가 이번 추석을 접수하게 된다면, 영화 관계자들은 또 다시 한목소리를 내게 될 거다. "배급에서 '신의 한 수'는 정말 하늘이 내려주시는 것"이라고.
이정혁 기자 jjangga@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