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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이 대한민국의 엄마들을 응원하는 '엄마도 꿈이 있단다'(이하 엄마 꿈) 캠페인 인터뷰를 시작합니다. '엄마 꿈' 캠페인은 많은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 육아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엄마들에게 작은 희망과 용기를 주고자 기획됐습니다. 엄마이자 아내, 그리고 방송인으로서 자신의 꿈을 사회에서 당당히 펼치고 있는 박경림씨가 우리의 엄마들을 대표해 사회 각계각층의 스타 엄마들을 직접 찾아가 만납니다.
정리=김겨울 기자 winter@sportschosun.com
'엄마 꿈' 캠페인 두 번째 인터뷰 '영화를 꿈꿨던 가난한 소녀'
1990년대 20대의 어린 나이에 '미스 심'으로 불리며 영화계에 입문했다는 명필름 심재명 대표. 그녀는 1996년 '코르셋'을 시작으로 '공동경비구역 JSA'. '와이키키 브라더스', '그때 그 사람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 지난해 수지 신드롬을 일으킨 '건축학개론'과 애니매이션 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까지 서른 세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이제 명필름이 만들면 '믿고 보는 영화'로 통용되는 현재까지 꿈을 향한 심재명 대표의 열정을 들어봤다.
박경림(이하 박)-처음 영화 쪽 시작할 때는 어떤 분위기였나요?
심재명(이하 심)-영화계에 들어왔을 때 누가 제 이름을 부르겠어요. 다들 '미스 심'이라고 불렀어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업무 환경이지만 그때는 커피도 타고, 복사도 하면서 카피도 쓰고, 기획도 했죠. 지금은 제작이나 현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 영화인이 많지만 그때는 아무래도 열악했어요.
박-집안 형편은 어땠나요?
심-굉장히 가난했죠. 2남2녀였는데 무슨 취미 생활을 하거나 할 형편은 아니었어요.
박-서른 편 이 넘는 영화 속에 어린 시절의 경험과 상상이 묻어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심-그렇겠죠. 가난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누가 설명을 해줬다면 좋았을텐데, 그 때는 부끄러웠어요. 거꾸로 상처나 아픔, 결핍, 이런 것들이 자양분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너무 부족함이 없었다면 무엇을 끄집어낼 수 있었을까요. 창피했지만 지금은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서 소통하기 좋았어요.
박-25년 전 영화계는 더 남성 중심이었겠죠. 여자가 버티려면 어떻게 했을까요?
심-더 씩씩하게 남성처럼 하려고 했어요. 그러다보니 목소리도 굵어졌어요. 그때는 그저 좋아하는 일에 풍덩 빠져서 했어요. 그저 일을 해서 성과를 내는데 집중했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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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딸이 있으시죠. 엄마가 된 후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요.
심-아기를 가지면 육아에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죠. 정부나 사회에서는 책임을 나누려하지 않아요. 한 여자의 몫, 친정 엄마의 몫, 시어머니의 몫으로 돌리죠. 제 후배들 중에는 일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거나, 결혼을 해도 아기를 낳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한국 사회 출산율이 낮은데 영화계는 더 낮아요. 다행히 저는 아기를 낳을 때 영화사 대표였기 때문에 제 시간을 융통성 있게 쓸 수 있었어요. 친정엄마가 희생하신 부분도 있고요. 가끔은 아기를 사무실에 데리고 와서 직원들이 놀아주기도 하고, 그럴 때도 있었죠.
박-어릴 때는 서운한 걸 많이 표현했을 텐데요.
심-행운인 게 애가 어릴 때부터 이해심이 많은 편이었어요. 6살 때 차를 타고 가다가 '엄마는 언제부터 일하는 여성이 되고 싶었어요?'라고 묻더라고요. 일하는 엄마가 싫고, 같이 있고 싶다고 한 말인데 그 뒤로는 떼를 쓰지도 않고, 저보다 훨씬 이해심이 많더라고요. 제가 좋은 딸을 만난거죠.
박-딸을 키울 때 한 번은 고비가 오지 않나요. '일을 그만두고 키워야 하나' 이런 고민요.
심-이 질문을 받고 보니 그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네요. 일 욕심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아이 때문에 일을 그만둔다기보다 오히려 내가 하는 일에 회의가 들어서, 직업이나 영화에 대한 고민 때문에 일을 그만둘까 생각했었네요. 가치의 문제인 것 같아요. 저는 무의식적으로 일과 딸, 일과 가정, 두 가지를 다 놓고 생각했어요.
박-학교도 가야하고, 그럴 때는 분담이 쉽지 않았을텐데요.
심-전업 주부들과 친해지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초등학교 1학년 때 모임도 부지런히 나가서 소외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 엄마들과는 아직도 친해요. 그 엄마는 제 딸의 제 2의 엄마에요. 대모님 정도 되겠네요. 하하. 딸이 그 엄마 생일 때 축하 전화도 하고요. (2편에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