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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의 돌풍이 매섭다. 천민 하선(이병헌)이 왕 광해의 대역을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다. 지난 17일까지 963만 346명의 누적관객수(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를 기록했다. 2012년 개봉 영화 중 '도둑들'에 이어 두 번째 1000만 관객 동원이 확실시된다. '광해' 신드롬은 정치권에서도 뜨겁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이 영화를 관람했다. '왕이 되고픈' 후보들이 '광해'란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관객들은 '광해'를 보며 어떤 지도자를 기대하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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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문 후보는 대선 후보 수락연설에서 "변화의 새 시대로 가는 새로운 정치의 문을 저 문재인이 열겠다"며 법적 권한 이외의 대통령 포기, 책임총리제 및 정당 책임정치 구현 등의 쇄신안을 내놨다. 안 후보는 출마 회견을 통해 정당에 기반하지 않는 선거 운동, 독자 출마, 네거티브 없는 선거 운동 등을 내세우며 기존 정치와는 전혀 다른 정치를 펼치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광해'는 바로 이런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염원을 되새기게끔 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실존인물(광해, 허균 등)과 실제 업적(대동법, 호패법, 중립외교)을 바탕으로 당시의 정치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 과정에서 제 배 불리기에 바쁜 조선 세도가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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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가 그리는 내용은 세 후보가 처해있는 상황이나 세 후보의 특성과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래서 흥미롭다. 문 후보는 지난 12일 '광해'를 관람했다. 관람 후 빈 객석에 혼자 앉아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화제가 됐다. 문 후보는 다음날 대학언론과의 미팅에서 "영화가 노무현 대통령 생각을 많이 나게 했다"며 "참여정부 때 균형외교를 천명했다가 공격을 받았던 것이라든지 곳곳에 그런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장면이 많아서 그런 감정이 들었던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광해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는 장면이 고 노무현 전대통령이 미국과 중국 사이의 균형 외교를 강조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
안 후보의 경우 '시민 후보'라 불린다. 정치 경험이 전무하고 당적이 없다. 선거 캠프 역시 실무진 위주의 팀제로 이뤄져 있다. 하루 아침에 천민에서 왕이 된 하선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런 정치적 지지 기반이 없는 하선은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해나간다. 안 후보는 9일 영화를 관람한 후 트위터를 통해 "약자를 대하는 지도자의 진정성이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박 후보의 경우 원칙과 신뢰, 뚝심이 상대적 강점으로 꼽힌다. 주변의 왈가왈부에 흔들리지 않고 우직하게 자신의 갈 길을 가는 하선 역시 이런 면이 돋보이는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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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힌트도 제시한다. 대선 주자들로선 앞으로 어떤 정치를 펼쳐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다. 바꿔 얘기하면 세 명의 후보가 어떻게 하면 국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다.
'광해'가 제시하는 '새로운 정치'는 바로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 정치다. 영화엔 이런 정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바로 왕이 된 천민 하선이 사월이(심은경)를 안은 채 버선발로 뛰는 장면이다.
사월이는 부패한 관리들의 횡포로 부모님과 헤어지고 15세 어린 나이에 궁으로 팔려오게 된 나인이다. 사월이의 딱한 사연을 들은 하선은 이를 측은하게 여긴다. 이는 하선이 '진짜 왕'이 되고자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하지만 사월이는 왕을 둘러싼 음모에 휘말리게 되고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 과정에서 하선은 피를 토하는 사월이를 번쩍 들어 앉고 버선발로 뛰쳐나간다. 사월이를 바라보는 하선의 표정은 너무나 애달프고 간절하다.
어려움에 처한 국민을 위해 버선발로 뛰쳐나가는 지도자. 지금 우리 국민들이 원하는 대통령이 바로 이런 지도자가 아닐까? 극 중 하선처럼 "땅 열 마지기 가진 이에게 쌀 열 섬을 받고, 땅 한 마지기 가진 이에게 쌀 한 섬 받겠다는데 그게 차별이요?", "도대체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요? 백성들이 지아비라 부르는 왕이라면 금수의 탈을 쓰더라도, 내 빼앗고 훔치고 빌어먹을지언정 그들을 살려야겠소. 그대들이 죽고 못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백 갑절은 소중하오!"와 같이 국민의 편에서 소리칠 수 있는 대통령 말이다.
이쯤되면 '광해'는 영화가 단순히 예술 작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음을 여실히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정해욱 기자 amorry@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