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핫포커스]배려 없인 존중도 없다, '리스펙트 정신' 되새길 때

박상경 기자

기사입력 2019-04-29 15:08 | 최종수정 2019-04-30 05:59


◇두산 김태형 감독. 잠실=최문영 기자 deer@sportschosun.com

희비가 극명한 스포츠의 세계에서 '존중'은 유독 강조되는 단어다.

실력차를 떠나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축하할 때 대중은 더 큰 박수를 보낸다. 존중은 스포츠가 대중에게 주는 가장 큰 감동이자, 사랑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28일 잠실구장에서 촉발된 '감독 벤치 클리어링'. 시선은 두산 베어스 김태형 감독에게 쏠렸다. 상대에 대한 존중은 없었고, 가시돋친 말들이 수많은 팬들 앞에서 튀어나왔다. 김 감독의 격한 반응에 롯데 양상문 감독은 분을 참지 못한 채 더그아웃을 뛰쳐 나왔다. 팀의 구성원인 코치, 선수가 상대팀 감독에게 비난 받는 모습을 참지 못하는 것은 한 집안의 가장인 사령탑이라면 당연한 반응이다. 양 감독은 경기 후에도 격앙된 반응을 숨기지 않았다. 경기 내용, 결과를 떠나 상대에게 존중받지 못한 아쉬움이 큰 눈치다.

김 감독의 '직설화법'은 새롭지 않다. 과거 두산 투수들이 상대 선수들에게 사구를 던져 부상했을 때, 그의 반응은 "승부의 세계가 원래 그렇습니다", "남의 선수 신경 왜 써요?"였다. '내 식구 지키기'를 위한 그만의 단호한 소통법이었지만, 상대에겐 적잖은 상처가 될 만한 말들이었다. 이번 사태 역시 마찬가지다. 빈볼-실투 문제를 넘어 상대 코치와 선수를 향해 한 말들이 과연 4시즌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 2차례 우승과 준우승을 거둔, 자타공인 KBO리그 명장 다운 품격을 갖추고 있었는지를 곱씹게 한다.

최근 KBO리그에선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선수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폴더 인사'가 그것. '폴더 인사'는 상대 타자를 공으로 맞춘 투수가 선후배 관계를 막론하고 타자에게 허리를 90도 가까이 굽혀 직접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모습을 두고 붙은 말이다. 그동안 투수들이 타자를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 시킨 뒤, 간단히 모자 끝부분을 손가락으로 잡거나, 눈을 맞추며 미안한 감정을 간접적으로 전하는게 일반적이었다. 타자의 모습에 크게 개의치 않고 투구를 이어가는 모습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올 시즌 초 신인급 투수들로부터 시작된 '폴더 인사'는 최근 외국인 투수 덱 멕과이어(삼성 라이온즈)까지 가세하면서 KBO리그 만의 독특한 문화로 자리 잡아가는 모양새다.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너무 과한 반응 아니냐는 시각도 있지만, 상대를 존중하는 '리스펙트 정신'을 대체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번 사구 논란의 당사자인 구승민(롯데 자이언츠)과 정수빈(두산 베어스)이 보여준 모습도 폴더 인사에 담긴 리스펙트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구 직후 걱정스런 표정을 짓다 논란 뒤 결국 마운드를 내려갔던 구승민은 경기 직후 정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닿지 않자 문자메시지를 통해 미안함을 전했다. 직접 찾아가는게 도리지만, 선수단 이동 일정에서 홀로 빠질 수도 없었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골절에 혈흉이라는 중상을 입은 정수빈의 대처는 놀라울 정도로 의연했다. 그는 구승민에게 "경기 중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너무 신경쓰지 말고 다음 경기 준비 잘해서 좋은 모습 보이라"고 격려했다. 과오를 순순히 인정한 구승민이나, 더 '통큰 마음'으로 화답한 정수빈의 모습 모두 '리스펙트 정신'의 귀감이 될 만하다.

다시 시계를 돌려보자. 김 감독의 시선에서 자식 같은 소속팀 선수의 부상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은 누구나 공감할 만하다. 그러나 그 표현 방식이 분노라면 공감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김 감독의 직설화법은 불과 1년 전까지 같은 유니폼을 입고 한솥밥을 먹었던 동기 야구인과 마운드 위에서 최선을 다한 선수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논란 초반 "야구 좀 잘하지"라는 말했다던 김 감독은 경기 후 공필성 수석코치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고 한다. 언론을 통해서도 일련의 사태에 대해 사과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김 감독이 정수빈의 사구 때 그라운드로 나온 롯데 코치진이나 구승민을 상대로 좀 더 의연하게 대처했다면 논란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리그 최강팀 다운 품위를 지킨 명장'으로 큰 박수를 이끌어 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강한 것이 옳고 아름다운 시대다. 하지만 그 힘의 밑바탕에 존중이 깔려있지 않다면, 진정한 강자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두산 왕조'를 연 김 감독에게 이번 사태는 어쩌면 모두가 인정하는 진정한 강자이자 명장으로 거듭날 수 있는 타산지석의 기회다.


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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