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야구에 '불가능'은 없다.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손 안의 패를 탈탈 써봐야 후회가 남지 않는다는 지론으로 수 십년간 그만의 야구 세계를 구축해왔다. '야신' 김성근 한화 이글스 감독의 야구는 그래서 처절하고도 흥미진진하다.
이런 고정 관념의 탈피는 극단적으로 파격적인 선수 기용에 드러난다. 고정된 포지션 따위는 무의미하다. 그래서 종종 '트랜스포머'들이 나타난다. 본연의 포지션이 아닌 자리에서 경기에 등장하는 선수들이다. 대부분 승리를 따내기 위한 김 감독의 기발한 발상에서 나온 경우다.
|
올해도 벌써 두 차례 사례가 나타났다. 팀의 필승 수호신들인 박정진과 권 혁이 경기 후반 타자로 나섰다. 박정진은 지난 1일 대전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7-5로 전세를 뒤집은 7회말 2사후 타석에 나왔는데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다.
이어 권 혁이 지난 17일 대전 넥센 히어로즈전에서 6-6으로 맞선 9회말 2사 만루 때 타석에 등장했다. 그러나 결과는 풀카운트 승부 끝에 삼진. 손승락이 혼신을 다해 던진 공은 권 혁이 치기에는 무리였다.
이 두 차례 케이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선발이 모두 일찍 무너졌다는 것. 1일에는 유먼이 나와 3⅓이닝 만에 8안타(1홈런)로 5실점(4자책)하고 강판됐다. 또 17일 넥센전 때는 안영명이 나와 2⅓이닝 4안타 2볼넷으로 4실점했다. '선발 조기강판'이 의미하는 건 결국 초반 리드를 내줬다는 뜻이다. 두 번째 공통점은 한화가 모두 초반 리드를 내준 채 끌려갔다는 것. 당연히 추격을 위해 전력을 쏟아부을 수 밖에 없다. 불펜 뿐만 아니라 대타, 대수비, 대주자 요원들까지 총동원된다.
결국 박정진과 권 혁 역시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다. 분주한 교체 과정에서 지명 타자가 바뀌었고, 투수는 그 자리에 나가야 했기 때문. 감독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강수는 공통적으로 '승리'를 불러왔다.
승리를 위한 최 정의 포수 변신
이런 식의 기용은 사실 '김성근 야구'에서는 새삼스럽지 않다. 관건은 '승리'다. 승부를 뒤집기 위해서 모든 가용전력을 쏟아붓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포지션 파괴를 해야 하는 케이스다. 지금부터 4년 전. 김성근 감독이 SK 와이번스를 맡았던 마지막 시즌에도 나왔다.
당시 잠실구장에서 LG를 만난 SK는 7회까지 0-4로 뒤지고 있었다. 그러다 8회초에 1점을 뽑아낸 뒤 9회초에 대거 5점을 뽑아 전세를 뒤집는 데 성공한다. 이 역전을 일궈내는 과정에서 SK는 포수 요원을 전부 교체 카드로 쓰고 만다.
하지만 9회말 수비가 남아있었다. 스코어는 6-4, 2점차라면 LG가 충분히 뒤집을 수 있다. 9회말 수비는 SK 입장에서 대단히 중요했다. 그런데 하필 이 순간에 남아있는 포수 요원이 없었다.김 감독도 9회초 마지막 포수 최경철 타석 때 대타를 쓰면서 이런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꺼내든 것이 바로 '포수 최 정'이었다. 조범현 감독 시절이던 2006년 6월13일 두산전 때도 최 정이 잠시 포수 마스크를 쓴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대안이 없는 선택. 김 감독은 포수 최 정-마무리 정우람 카드를 내면서 모든 걸 맡겼다. 결과는 대성공. 이들은 LG 1~3번 타자를 연속 땅볼로 돌려세우며 승리를 지켰다.
의도가 담긴 '묻지마 변신'도 있다
하지만 김 감독의 포지션 파괴가 늘 '승리를 위한 총력전'의 과정에서 나온 건 아니었다. 선수나 상대 팀, 혹은 야구계를 향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엉뚱한 선수 기용을 감행한 적도 있다. 이건 '승리'와는 무관했다. 실제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경기는 모두 졌다.
2010년 6월23일 인천 문학구장에서는 당시 팀의 에이스였던 김광현이 타자로 등장했다. 3-10으로 뒤지던 SK의 8회말 2사 만루 상황. 점수차가 워낙 커 역전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김 감독은 갑자기 나주환을 빼고 대타로 김광현을 투입했다. 대타 카드로 선발에서 제외된 최 정이 있었음에도 엉뚱하게 투수 김광현을 투입한 것. 이날 경기에서 공수에 걸쳐 부진했던 나주환에 대한 징계의 의미로 해석됐는데, 정작 김 감독은 이에 대해 "노코멘트"라고 밝혔다.
이에 앞서 이미 2009년에도 시위성 포지션 파괴가 나온 적이 있다. 2009년 6월25일 광주 KIA 타이거즈전 때였다. 이 시기에 SK를 이끌던 김성근 감독은 KBO의 새로운 승률 계산방식에 관해 계속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김 감독 뿐만 아니라 많은 현직 감독들이 제도의 불합리성을 지적했다. 사실상 '무승부=패'로 규정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
결국 김 감독은 실전을 통해 이런 불만을 표현했다. 당시 두 팀은 5-5로 맞선 채 연장 12회에 접어들었다. SK 입장에서는 연장 12회초에 점수를 내지 못하면 사실상 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김 감독은 연장 12회초 2사 후 타석에 투수 김광현을 대타로 내보냈다. 지명타자였던 김재현이 1루를 맡게되면서 벌어진 상황. 결국 삼진을 당하고 물러났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연장 12회말 수비 때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3루수 최 정이었다. 그리고 1루수로는 투수 윤길현이 나갔다. 어차피 패를 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투수 전력을 아끼는 동시에 특이한 기용법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켜 KBO에 항의하려는 의도가 담긴 포지션 파괴였다.
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
[
※보도자료 및 기사제보 news@sports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