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수, 두번의 만루위기와 두번의 슬라이더

정현석 기자

기사입력 2013-05-15 09:50 | 최종수정 2013-05-15 09:50


리그 2.3위를 달리고 있는 삼성과 두산의 2013 프로야구 주중 3연전 첫 경기가 14일 잠실 야구장에서 펼쳐 졌다. 삼성 배영수가 선발 등판 두산 타선을 상대로 역투를 하고 있다.
잠실=조병관기자 rainmaker@sportschosun.com/2013.05.14/

'멘탈갑(甲)'이란 인터넷 합성어가 있다. 충분히 떨릴만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모습.

삼성 베테랑 투수 배영수(32)가 꼭 그렇다. 그의 올시즌 신종 별명은 '개만두'. 얼핏 상스럽게 들리는 이 표현은 '개막전 만루홈런 두 방'의 줄임말이다. 3월30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두산과의 개막전에 선발 등판했다가 치욕적인 기록을 떠안았다. 1회 오재원, 4회 김현수에게 만루홈런을 얻어맞으며 무려 8실점. 개막전 만루홈런 2개는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다. '사건' 이후 그는 어땠을까. 배영수는 "그냥 잘 잤다. 박찬호 선배도 '한만두'라는 별명이 있지 않느냐. 야구하다보면 별의 별 기록 다 나온다"며 웃었다. '개만두'란 말도 박찬호의 '한만두(한경기 만루홈런 두방)'에서 따와 스스로 붙인 별명. 박찬호는 지난 1999년 세인트루이스전에서 같은 이닝에 같은 타자(페르난도 타티스)에게 만루홈런을 2방을 연속으로 허용한 바 있다.

'개만두'의 악몽을 훌훌 털고 일어선 배영수. 개막전 패배 이후 5월4일 롯데전까지 거침 없는 4연승을 달렸다. 그리고 14일 잠실 두산전. 개막전 악몽을 안긴 바로 그 팀이다. 배영수는 웃으며 "복수혈전"을 다짐했고 멋지게 실천했다.

공교롭게도 시작부터 만루 위기를 맞았다. 2-0으로 앞선 1회말 2사 만루에 타석에는 김동주. 전성기 때 같은 무시무시한 클러치히터는 아니지만 만루홈런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상대. 하지만 배영수는 2B1S에서 134㎞짜리 바깥쪽 슬라이더를 던져 타이밍을 빼앗으며 평범한 외야 플라이를 유도했다. 4-1로 앞선 5회. 만루 위기가 또 한번 찾아왔다. 2사 1,2루에서 김동주에게 몸에 맞는 볼로 출루를 허용했다. 타석에는 직전 타석에서 안타를 빼앗았던 좌타자 최주환. 배영수는 잇달아 볼 3개를 던졌다. 밀어내기 볼넷 위기였다. 만약 밀어내기로 실점했다면 승리투수 요건을 눈 앞에 두고 교체될 수도 있었던 긴박한 흐름. 하지만 배영수는 역시 '멘탈갑'이었다. 패스트볼 2개를 잇달아 스트라이크 존에 통과시켜 풀카운트. 패스트볼에 타이밍을 맞힐 수 밖에 없었던 타자를 상대로 배영수는 또 한번 131㎞ 짜리 슬라이더로 승부를 걸었다. 패스트볼에 타이밍을 잡고 있던 최주환의 몸이 일찍 열렸고 뒤늦게 급히 퍼올린 공은 타구는 1루수 파울 플라이에 그쳤다. 5이닝 1실점으로 승리요건을 채운 배영수는 팀의 7대3 승리로 시즌 5승째(1패)를 거두며 다승 단독 선두에 올랐다.

악몽의 데자뷰를 떠올리게 했던 시작과 끝의 만루 위기. 마운드 위에 선 당사자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배영수는 "개막전에 이어 만루 위기가 두번 있었는데 이번에는 절대 안 맞겠다는 생각으로 간절하게 던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승리투수가 됐지만 한 주의 첫 경기에서 이닝을 오래 못끌어 줘서 중간 투수들에게 미안하다. (조)동찬이와 (채)태인이 등 야수들이 실점할 상황에서 막아줘 고마웠다. 내가 나갈 때마다 타선과 궁합이 맞는것 같다. 야구는 그래서 정말 팀 플레이라는 걸 느낀다"며 동료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표현했다.

아무리 베테랑이라도 아픈 기억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다. 악몽의 데자뷰를 절로 떠올리게 했던 두번의 만루상황. 물러설 곳 없는 벼랑 끝에서 선 배영수는 자신의 슬라이더를 믿었다. 자신과 동료에 대한 믿음, 그리고 긍정의 힘으로 위기 탈출에 성공한 배영수. 기억조차 하기 싫은 아픔이 몸에 좋은 쓴 약이 됐다. 예전처럼 불같은 강속구를 뿌리지는 못하지만 배영수는 매 순간 후배들에게 투수로 살아가는 방법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귀감이다.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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