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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치 히터(Pinch Hitter)', 우리식으로 '대타'는 감독의 고유권한이자 가장 적극적으로 경기에 개입할 수 있는 공격 옵션이다.
원래 예정돼 있던 타자 대신 전혀 새로운 인물을 내세움으로서 상대의 허를 찔러 경기 흐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 대타의 묘미다. 그래서 팬의 입장에서는 감독이 대타를 기용하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하는 기대와 흥분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데 대타기용이 앞서 사례와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화제를 모으는 경우도 있다. '공격 옵션'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다른 의도를 품은 대타다.
12일 잠실 LG-SK전에 나온 9회말 LG 투수 신동훈의 대타 투입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전에도 이런 사례가 있었다. 2010년 6월 23일, 인천구장에서 열린 SK-LG전에서 당시 김성근 SK감독은 3-10으로 뒤지던 8회말 2사 만루 때 에이스 김광현을 타석에 들이밀었다.
이 두 차례의 대타에 담긴 것은 '공격의 의지'가 아니라 '감독으로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하지만 두 사례는 같으면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 두 장면의 같은 점과 차이점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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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늘 감독의 의도대로 흐를 수는 없다. 수많은 연습을 시켜온 선수들이 예상치 못한 본헤드 플레이 혹은 실수를 저지르거나 아니면 상대팀에서 예상치 못한 수를 꺼내 심기를 자극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해서 매번 감독이 일일히 목소리를 높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때로는 '정말 아니다' 싶은 순간도 나온다. 감독의 입장에서는 '이쯤되면 한번 짚고 넘어가야겠군'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대부분의 감독들은 덕아웃을 박차고 나와 강한 어필을 하거나 즉각 자기팀 선수를 바꿔버리곤 한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메시지를 전할 때가 있다. 현 고양 원더스의 김성근 감독이 SK사령탑 시절 이런 장면을 종종 연출했다. 2009년 6월 25일 광주 KIA전 때는 투수 김광현을 대타로, 3루수 최 정을 투수로, 그리고 투수 윤길현을 1루수로 쓰는 변칙 운용법을 선보였다. 이는 연장전 무승부를 패배로 처리하는 당시 규정에 대한 항의로 해석되기도 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2010년 6월 23일 인천 LG전 때도 3-10으로 뒤지던 8회 2사 만루 때 나주환을 빼고 김광현을 대타로 내보냈다. 이 장면에 대해서는 앞서 경솔한 도루 시도로 추격의 흐름을 끊은 나주환에 대한 경고와 앞서 계속 나온 LG와의 빈볼성 투구 시비에 대한 항의라는 해석이 교차했다.
이후 2년 만에 앞서와 비슷한 장면이 나왔다. 이번에는 올해로 처음 1군 감독직을 맡은 LG 김기태 감독이 주도했다. 김 감독은 12일 잠실 SK전에서 0-3으로 뒤진 9회말 2사 2루 때 박용택 타석에 신인 투수 신동훈을 대타로 투입했다. 그리곤 대기타석에 있던 정의윤마저 덕아웃으로 불러들였다. 바둑으로 치면 '돌을 던진' 케이스다.
이 역시 김 감독의 의도가 담긴 기용법으로 해석된다. 이날 유난히 많은 실책을 저지른 팀 야수진에 대한 경고 혹은 3점차로 앞선 9회에만 3명의 투수를 내보낸 SK 이만수 감독에 대한 항의라는 분석이 나왔다.
이렇듯 예상치 못하게 타석에 들어서게 되는 투수들은 결국 감독의 불편한 심기와 무언의 의도를 나타내는 '메신저'로 보는게 타당하다. 결국 '2010년 김광현'과 '2012년 신동훈'은 각각 김성근 감독과 김기태 감독의 목소리를 품은 전령(메신저)이자 또 다른 아바타였던 셈이다.
김성근 감독에게는 있고, 김기태 감독에게는 없던 것
그러나 비슷한 의도를 담은 액션이라고 해도 2년의 시차를 둔 이 두 케이스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존재한다. 김성근 감독에게는 노련함과 세련함이 있었지만, 김기태 감독에게는 그게 없었다.
2010년 당시 김 감독의 김광현 대타 기용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과정은 일사분란했다. 2사 만루에서 김광현에게 방망이를 쥐어주고, 나주환을 빼는 일련의 과정에서 SK 벤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김 감독의 카리스마와 권위에 절대적으로 복종했기 때문이다. 이후 불거진 여러 해석의 시도에 대해서도 김 감독과 SK는 굳건한 모습을 이어갔다.
결과적으로 SK는 그해 정규시즌을 1위로 마치고, 한국시리즈까지 제패한다. 돌이켜보면 김 감독의 이런 행위는 시즌 중반 전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선수단에 긴장감을 이끌어내고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2012년 LG 김기태 감독의 신동훈 대타 기용과정에서는 몇 가지 아쉬움이 노출된다. 하나는 감독이 스스로 흥분해 경기를 포기했다는 인상을 남긴 것이다. 승부욕이 강한 김 감독이 일부러 지려고 경기를 운용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패배를 감수하고서라도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던 것은 명확하다. 2010년 김성근 감독과 마찬가지의 심리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김기태 감독은 흥분을 겉으로 표현했다. 대기타석에 있던 정의윤을 덕아웃으로 불러들인 장면이 '악수(惡手)'다. 더 이상 경기를 이어갈 뜻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내보인 셈이다. 노회한 김성근 감독은 자신의 마음을 짙은 선글라스 뒤로 감췄으나 혈기넘치는 김기태 감독은 그러지 못했다.
또 다른 아쉬움은 벤치의 동요를 막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날 신동훈을 대타로 기용하려 하자 조계현 수석코치가 만류하는 장면이 나왔다. 수석코치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재고를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의사결정과정의 초기 단계에 나와야 한다. 이후 결정이 내려진 뒤에는 벤치의 동요가 겉으로 드러나서는 곤란하다. 젊고 혈기넘치는 신임 감독에게 이런 내부의 동요는 자칫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다.
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